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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본 우리시대 예술가 ①김환기(1913~74)
키워드로 본 우리시대 예술가 ①김환기(1913~74)
  • 김현숙 덕성여대
  • 승인 2004.1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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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인 부드러움으로 추상된 자연...동양적 틀에 가둔건 아닌지

김환기는 한국적 혹은 동양적 정서가 담긴 추상화를 창조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국내의 보장된 지위와 안정된 삶에 안주하지 않고 오십을 넘긴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혼신을 기울여 제작한 수많은 점화들은 추상이라는 보편적 미술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내부에 한국인으로서의 숨결과 정서를 담아냈다. 우주적 스케일로 전개되는 추상이면서도 고향 기좌도의 달과 바다, 서울의 산과 하늘, 그리운 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연상시키는 점이 보석처럼 박혀 공명함으로써 개별과 보편, 특수와 전체가 혼융하는 독특한 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화가가 말년에 도달한 이러한 작품세계는 10년간의 미국 생활로 인해 새롭게 전개된 것이 아니라 초기부터 말기까지 일관되게 추진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각별하다. 1930년대 중반부터 추상미술을 시도,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화가라는 입지전적 인물이 된 김환기는 초기부터 서구 추상화에의 무반성적 경도를 경계하고 동양과 한국의 전통적 미감 및 정서가 흐르는 추상의 세계를 지향함으로써 주체적 입장을 견지하고자 했다. 선, 면, 색의 조형적 디자인에 입각한 추상이 아니라, 전통문화의 유산에서 추상의 가능성을 발견해 그 내부에 자연의 숨결과 정서를 담되 시대의 촉각으로 빚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김환기 예술의 정수를 집약하는 개념은 무엇보다 ‘동양적 자연관’과 ‘한국적 추상’이 될 것이다. 한국적 추상을 전개하는 근간이 된 ‘동양적 자연관’은 대체로 자연에 대한 시정과 관련된다. 동양적 자연관은 말기의 순수 추상기에도 작가의 내면을 흐르는 큰 줄기로 작용했으며, 작품에 대한 평자들의 견해도 ‘동양적 자연’이라는 수식으로 집약됐다. 다음으로는 추상화가로서 첫 발을 내디뎠던 1930년대 중반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화가가 추구하고 도달했던 종국의 경지를 ‘한국적 추상’으로 보아 김환기 작품세계를 결정화하는 개념으로 다루고자 한다.

①동양적 자연관
김환기 사후 1975년 서울에서 ‘수화회고전’이 열렸을 때 평론가 이일은 수화의 미술을 ‘동양적 자연인의 풍취’라고 기술했고, 1977년 여름 일본 동경에서 ‘한국현대미술단면전’과 함께 ‘환기회고전’이 열렸을 때 아사히신문은 수화의 미술을 ‘동양인의 심상풍경’이라고 기재했으며, 미즈에지는 “작가는 생애동안 망향의 노래를 계속 그렸다”라고 평했다. 여기서 망향이란 물론 동양적인 자연에의 그리움이다. 수화와 가장 막역한 사이였던 미학자 조요한이 수화 사후에 쓴 글 속에도 “수화는 자연에서 동양적인 미를 끄집어냈다. ‘寂寂廖廖本自然’의 동양적인 이상이 흐르고 있다”라고 썼다. 그렇다면 과연 ‘동양적 자연’이란 무엇이며, 수화 작품의 어떤 면이 동양적 자연을 반영한다고 평가되는가.

김환기는 시종 자연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한국의 전통문화에 뿌리를 대고 조선 백자의 살결과 선과 형을 노래했던 1950년대의 작품에서 그 특질이 두드러지는데, 여기서 백자는 자연과 등가를 이룬, 자연화된 전통이었다. “백자 항아리 궁둥이를 어루만지면 글이 저절로 풀린다”라는 弄속에는 백자에 대한 관능에 가까운 화가의 애착이 드러나 있으며, 하늘에 둥실 떠있는 달의 형상을 닮은 달항아리를 인간의 창조물이 아닌 자연물로 본 것도 각별한 측면이 있다.

김환기의 달항아리는 여인, 달, 산, 구름, 학, 매화 등 시적 감흥을 우발하는 자연적 소재들과 같이 등장하며 달을 품은 항아리로 표현되기도 한다. 백자 항아리와 학의 세계는 고미술품에서 받아들인 여유와 멋의 회화적 표현이라고 하겠는데, 특히 달 항아리는 조선백자 중에서도 가장 비인위적인, 곧 자연적이며 가장 조선적이라고 평가된다.

그런데 여기서 도자기, 여인, 달을 비롯한 자연 이미지는 서구와 대척되는 동양 이미지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도자기와 여인은 시노와즈리와 자포니즘 회화 속에 등장하는 정형화된 동양적 소재이며, 서구 문학 속에서 달은 그윽하고 유현한 빛으로 사물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는 동양적 정취의 메타포였다. 서구에게 동양은 신비하고 시적이며 섬약하고 시간과 공간 상 가장 먼 곳, 서구인들이 잃어버린 순정의 땅이었다. 산, 구름, 매화, 학 역시 비속함과 고매함을 상징하는 소재들로 동양 문인들이 즐겨다루는 소재며 화제다. 따라서 김환기의 도자기 그림은 문인들이 노래했던 시화의 전통에 서구가 동양 이미지로 발견한 도자기와 여인을 첨가시킨 셈이 된다. 그러나 서구가 도자기와 여인을 물질화하고 대상화하는 차원에 머물렀다면 김환기의 그림에서 도자기는 정신성, 자연성을 유추하였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해방 이후 민족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조선 백자는 전통적 가치를 지니는 고전으로 승격됐다. 김환기는 고전이 된 조선의 백자를 추상 양식으로 조형화함으로써 민족적 미감의 현대화에 성공했다. 동양의 無와 空사상을 문인취향과 결합시킨 김환기의 도자기 그림은 청명하고 순수한 시적 감성으로 인류에 공명하는 미의 세계를 전개시켰다고 평가되지만, 관념적 신비적 성향으로 예술을 탈역사화하는데 일조했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산 덩어리 같어야 할 분노”가 일어나더라도 “누이의 수틀 속의 꽃밭을 보듯 세상을 보자”고 했던 서정주의 현실 인식과 대응이 김환기의 시적 감성 및 현실 인식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요구되는 부분이다.

②한국적 추상
한국적 추상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과 형식의 그림을 지칭하는 것인가, ‘한국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생략한 채 김환기 작품을 ‘한국적 추상’이라 정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다만 여기선 작가가 추구했던 ‘한국적 추상’이 어떠한 내용과 형식이었는가를 살피고 더불어 김환기 작품의 어떤 측면이 ‘한국적 추상’으로 수용됐는가를 살피는 정도에 머물 수밖에 없겠다.

추상미술에의 입문기부터 김환기는 전통문화의 유산이나 고향 산천의 형, 선, 색을 시대 언어로 번안한다면 현대의 전위미술이 될 수 있다는 신념에 입각해 작업을 했다. 특히 백자 항아리를 민족미의 정수로 끌어올려 그 독특한 형상미를 달, 하늘, 산, 구름, 새 등의 자연과 동질화하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일궈냈다. 白磁誦으로 집중됐던 1950년대 그림을 추상화로 분류하기는 어려우나 도자기의 형, 색, 선을 추상화해 자연화 시켰다는 역설적 성격에서 추상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 이러한 소재 및 주제에 근거해 이 시기까지 김환기 그림의 민족적 성격 나아가서는 ‘한국적 추상화’라는 성격부여의 근거를 확인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뉴욕시기의 순수 추상화인 점화 시리즈를 ‘한국적 추상’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데에 있다. “내가 찍은 점 하늘의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이라는 작가의 메모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색 점 하나하나에 조국 강산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작업 과정이 ‘한국적 추상’이라는 결과물의 성격을 완벽하게 담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의 의도와 결과물이 행복한 만남을 이루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한편 캔버스 보다는 무명 광목이나 종이를 사용해 드라이한 맛과 번짐의 효과로 풍부한 단색조의 회청색 울림 효과를 살렸으며, 연속되는 사각 공간의 질서 구조 속에서 수공작업으로 인한 미묘한 리듬의 변화를 살린 측면이 ‘한국적’ 혹은 ‘동양적’ 미감의 발현이라는 점에 많은 이들이 동조하고 있다. 김환기의 점화에 대한 평은 대체로 우주의 소리, 영혼에 위안을 주는 리듬과 섬세함, 몬드리안의 수직구도 보다 행복한, 신비스런 함축성, 시적인 부드러움 등으로 평가돼 그 결과 동양적 혹은 한국적이라는 수식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계적이고 문명적인 것은 서양, 수공적이고 자연적인 것은 동양이라는 이분법적 사고틀이 김환기 그림의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을 한국 혹은 동양이라는 좁은 지역성에 가둬버린 것은 아닌지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의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김환기 그림에 대한 ‘한국적 추상’이라는 상찬이 공허한 울림이 되지 않을 것이므로.

김현숙 / 덕성여대 미술사

 

樹話 김환기(1913~74)

이중섭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화가로 한국적인 정서를 듬뿍 담아냈다고 평가된다. 그의 예술세계는 초기 동경시대, 중기 서울·파리시대, 후기 뉴욕시대로 구분된다. 초기엔 입체파, 구성파의 영향을 거쳐 추상미술에 도달했고, 광복 후엔 추상적 바탕에 자연적 이미지를 굴절시킨 독특한 화풍을 펼쳐보였다. 초중기엔 주로 달, 산, 항아리, 학, 매화 등 고유한 우리정서를 담은 소재들을 그렸는데, 서양화가이면서 자연과 함께하는 동양인의 의식을 근간으로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좀 더 자유로워지는 건 뉴욕에 와서다. 자칫 소재주의에 갇힐 수 있었던 강박에서 벗어나 자연대상을 지우고 선, 점, 면들로 구성된 순수 추상으로 변모한다. 즉 모티프 해소, 순화된 색감, 공간의 심화와 확대라는 특징으로 그는 변화를 꾀한다. 그리고 이는 한국 근대회화의 추상적 방향을 여는데도 선구자적 역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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