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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압 이해없이 고종시대 설명 곤란…민권세력 미숙으로 봉건군주 근대화 주도
외압 이해없이 고종시대 설명 곤란…민권세력 미숙으로 봉건군주 근대화 주도
  • 서영희 산업기술대
  • 승인 2004.11.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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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에 개입하며(2)-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한다

서영희 / 한국산업기술대 근대사

필자가 寡聞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같은 전공이 아니면서 인접 분야 연구자간에 이번 교수신문 논쟁처럼 오랫동안 반론과 재반론이 이어진 경우는 보지 못했다. 더구나 같은 연구대상을 두고 서로 방법론을 달리해 연구해 온 경제사학계와 역사학계가 상보적인 입장에서 각자의 연구성과를 借用하기 보다는 상대방의 연구방법과 논리틀에 정면으로 비판적 태도를 내보인 것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이 같은 사태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수년전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지만 한국사학계는 그간 적극적인 대응을 자제해왔다. 하지만 논쟁이 거듭될수록 상반된 견해의 대립점들이 해소되기 보다 상호간의 오해와 불신이 더 쌓여가는 것을 보면서, 약 15년전 宮內府를 주제로 한 논문을 맨 처음 발표한 연구자로서, 또 대한제국기 정치사 연구에서 고종의 위상에 대한 재평가가 있어야 한다고 역설해 온 사람으로서 다소는 의무감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우선 논쟁에 참여한 김재호 교수와 이영훈 교수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근대적인 경제성장이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大韓帝國의 근대 개혁은 전혀 실체가 없고 일제의 침략이 없었더라도 스스로 멸망했을 왕국이라고 치부한다. 또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고종은 開明君主라기 보다는 부패무능한 봉건군주로서 식민지로의 전락과 망국에 대해 준엄한 책임 추궁의 대상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영훈 교수는 고종을 개명군주로 승격시키려면 적어도 ‘남다른 지성과 강인한 의지의 소지자로서 몇 가지 세상을 울릴만한 개혁을 추진하고 벌족의 竪黎퓽?폐지하여 왕궁사수용 대포라도 제작한 사람’이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0월 25일자, 332호). 이러한 기준에 들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니 강력한 리더십으로 양반토호를 억누르기 위해 서원을 철폐하고 戶布法을 실시했으며 전국 방방곡곡에 포대를 설치하는 등 강병책을 추진한 흥선대원군이 떠오른다. 하지만 아무도 대원군을 개명군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 정책의 지향점이 시대의 대세를 거스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만큼 독단적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1873년 親政을 시작한 후 개항을 결심하고 개화파를 정계에 데뷔시킨 장본인이었으며, 보수적인 정부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양 열강들과 잇달아 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海國圖志’,‘瀛環之略’ 등 洋務書들을 읽으면서 바깥사정에 귀를 기울였고, 서양인 선교사와 顧問官들을 통해 西器를 수용하려고 애썼다.

고종은 이영훈 교수가 오해하듯 소중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도학군주가 결코 아니었으며, 梅泉 黃玹의 표현에 따른다면, “스스로 자신의 雄略을 자부하면서 不世出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위로 列聖祖에 비교될 뿐 아니라 東方에서 처음 있는 군왕이 되려고 정권을 거머쥐고 세상일에 분주한” 그런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고종에게 우리가 문자 그대로 ‘開明’ 군주라는 칭호를 붙여주는 데 그렇게 인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가 추진한 근대 개혁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그 사고의 지향이 보수적이라기보다는 진보적(progressive)이라는 데서 나온 평가이다. 고종은 이미 萬國公法이 지배하는 세계질서를 받아들였으며 중국으로부터 독립의지 때문에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다가 청나라가 파견한 袁世凱에 의해 폐위를 당할 뻔하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이영훈 교수가 ‘임오군란시 고종이 청군을 불러들임으로써 개화파 관료들의 자주외교 노력을 좌절시키고 결국 망국의 길을 튼 과오가 너무 크다’고 한 것은 사실에 대한 대단한 무지다. 임오군란 당시 파병을 요청한 것은 고종이 아니라 천진에 체류 중이던 김윤식과 어윤중 등 온건개화파였으며, 청나라 측에서는 출병을 요청하는 고종의 친서라도 얻으려고 했으나 유폐중이라 불가하다는 어윤중의 말을 듣고 고종의 뜻과 상관없이 청군의 출병을 결정했던 것이다. 고종은 결국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 즉위로 反淸 의지를 만천하에 과시했으며 독립국의 位號는 자주적으로 칭할 수 있다는 논리로 정통 성리학의 입장을 고수하는 보수유생들의 반대를 가볍게 물리쳤다.           

이상에서 볼 때 개명군주로서 고종은 조선왕조의 전통적 지배계층인 양반관료들과는 세계관과 가치관을 달리했다. 대한제국 선포 후 광무연간의 정치구도는 고종의 절대군주권을 정점으로 李容翊과 같은 하층민 출신의 勤王세력이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였고 명문가문 출신의 양반관료들은 철저히 소외되었다. 황제 직속기구인 궁내부 소속의 소장 宮內官들이 식산흥업정책이나 密使 외교를 담당하였고 권력에서 소외된 大官 세력들은 각자 생존의 안전판을 찾아 외국공사관에 드나들다가 나중에는 재빨리 친일파 대신으로 변신하였다. 정치참여계층의 확대 측면에서 보자면 고종시대는 확실히 이전 시기에 비해 파격적이었으며 이들 신흥세력의 등장과 향배에 대해 적절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고종과 근왕세력들이 추진한 식산흥업정책의 성과일 것이다. 필자 역시 각종 경제지표에는 문외한이므로 구체적으로 대한제국기의 식산흥업정책이 얼마나 경제학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해 냈는지 증명해 낼 능력은 없다. 하지만 경제사학자들이 궁내부 內藏院을 고종황제의 사금고로 취급하고 막대한 비자금이 사치와 낭비로 탕진되었다고 단정지어 버리는 데는 반대한다. 김재호 교수는 내장원 수입이 근대적인 회계법의 적용조차 받지 않은 채 황제에 의해 전유되고 있었으며 대한천일은행, 한성전기회사 등에 출자된 황제의 내탕금도 미미한 수준이었다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틀은 정확히 일제가 재정정리사업을 시작하면서 내세운 명분과 일치하며 그 결과가 황실재산 강탈로 이어졌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대한제국기에 궁내부는 왜 황실업무 담당이라는 애초의 설립 취지와 다르게 통신사, 광학국, 철도원, 평식원 등 방대한 근대화 추진기구를 산하에 거느려야 했을까. 전국 43개군의 광산을 농상공부 관할에서 내장원으로 이속한 것은 외국자본의 침투를 막기 위한 것이었으며 내장원경 이용익이 주도하여 외국인 기술자를 고빙하고 자체적으로 근대적인 광업 개발에 나섰던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1905년 현재 통감부 재정고문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더라도 궁내부 내장원에 계류 중인 계약 건은 安南米 수입, 총 구입, 磁器廠의 기계 수입, 탄광 및 철도기계 수입 등이었다. 고종이 상해의 德華은행(Deutsche Asiatische Bank)에 맡겼던 비자금은 을사조약 이후 해외로 망명한 근왕세력들의 밀사외교 자금으로 쓰였는데, 1907년에서 1908년 사이 일제가 황제의 예금인출 명령서를 위조하여 전액 인출, 착복해버렸다. 물론 일제의 침탈이 없었더라도 대한제국이 추진한 근대화 정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스스로 중단되었거나 질적으로 의미있는 결과를 내지 못한채 지지부진을 계속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식산흥업정책이 일제에 의해 ‘중단’되었다고 하지 않고 애초부터 전혀 없었다고 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요컨대 고종시대 역사에서 외압이라는 가장 중요한 변수를 제거하고 설명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역사적 진실과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개화파가 대중의 지지 확보에 실패한 것도 그들의 외세의존성 때문이었으며, 임오군란이나 갑신정변, 농민전쟁도 번번이 외세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역사의 향방을 바꾸어 놓았다. 근대 지향의 정치세력에 의해 해체되거나 무력화되었을 운명이었던 봉건군주 고종이 오히려 일제의 국권침탈에 저항하는 구심점의 위상을 확보한 것도 외압 때문이고, 그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발밑을 허물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특권상인세력에 의거한 중상주의정책이 성공했더라면 결국 그 토양 위에서 새로운 근대화 주도세력이 자라나게 되어 있으므로) 식산흥업정책을 추진한 것도 외세의 침탈 하에서 무력한 황제권을 근대적으로 보강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개명군주로서 고종이 추진한 근대화 정책을 인정한다고 해서 고종을 선양하거나 무조건 복권시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민권운동세력의 미숙으로 봉건권력의 중추인 군주가 근대화 개혁의 주체로 등장하는 한국 근대로의 이행과정의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자는 주장이다. 외압에 모든 책임을 돌리자는 것도 아니고 외압이라는 중대 변수가 엄연히 존재하는 구도 속에서 각 세력의 역학관계를 총체적으로 살펴보고 그러한 특수 조건에 놓인 王政의 주체로서 고종에게 적절한 위상을 부여하자는 주장이다. 이것은 한 자연인으로서 고종의 캐릭터가 유약하고 우유부단한가 아니면 40여년 정치풍파 속에 온갖 음모와 술수로 다져진 노회한 정객이었나를 묻는 개인적  평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5백년 조선왕조의 정치 전통이 만들어낸 왕정이 차지하는 공간에 대해 중요 변수로서 정당한 의미를 부여하자는 주장이다.      

 
그런데도 경제사학자들은 일제 침탈이라는 엄혹한 조건을 외면한 채 지나치게 높은 도덕성과 근대성의 기준을 적용해 고종에게만 책임을 묻는다. 역사가 고종 한 사람의 각성으로 그 무거운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 있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영웅사관일 것이다. 또 1960년대 이래 한국사학계가 쌓아온 대표적인 연구업적으로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이나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대한제국기 근대 개혁의 가능성은 부인하면서 토지조사사업 이후 일제시기에 가서야 비로소 의미있는 경제성장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인정하라고, “제도의 연속성을 숙고할 때 식민지시대 근대경제성장의 역사를 소거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장기역사에 통합해야 한다고” 심지어 ‘호소’(10월 18일, 331호 김재호 교수의 표현)까지 함으로써 우리를 당혹케 한다. 설혹 일제시대 한반도에서 일본인 지주의 철저한 노동 감독하에 토지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한들 그 성과물이 얼마나 이 땅에 남겨졌다고 현재의 우리 역사에 통합시켜 보자는 것인지 궁금하다. 경제사학자들이야말로 일제시대 경제성장을 조선후기 이래 우리의 ‘장기’ 역사와 단절시켜 완전히 새로 출현한 것으로 보면서 고작 36년에 불과한 이민족 지배자의 ‘단기’ 통치를 현대의 우리 경제와 통합시켜 보자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일제의 재정정리사업이나 토지조사사업이 가진 심각한 폭력성과 수탈성은 무시한 채 더없이 공정하고 객관적인 듯한 외피를 입힌 통계 수치로 그 야만의 시대를 다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근대만 달성되었다면 그것이 이민족 지배자에 의해서건 아니건 상관없다는 태도를 우리는 근대화지상주의라고 부른다. 혹자는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부패한 왕정이나 이민족 지배자나 수탈자이기는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성으로 코스모폴리탄을 꿈꾸는 우리네 지식인 연구자들과는 달리 역사속의 보통의 대중들은 오히려 소박한 동포애와 애국주의에 이끌려서 ‘나랏님’을 위해 눈물 흘렸을 것이다. 조선왕조의 유교 지식인들이 내내 중화문명에 경도되어 자기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듯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 역시 ‘근대’라는 또 하나의 우상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필자는 1998년 서울대에서 ‘光武政權의 국정운영과 日帝의 국권침탈에 대한 대응’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94-1904년의 政治體制 變動과 宮內府’, ‘개화파의 근대국가 구상과 그 실천’ 등의 논문이 ‘대한제국정치사연구’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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