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1-11-26 18:04 (금)
내장과 붕새라는 새로운 학문 패러다임
내장과 붕새라는 새로운 학문 패러다임
  • 김미정
  • 승인 2021.05.24 13: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책 『붕새의 날개 문명의 진로: 팽창문명에서 내장문명으로』는 재미있다. 분명 저자가 ‘김상준’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저자의 분신인지 친구인지 애매한 동선생, 서선생, 남선생, 북선생이 종종 크게 웃으며 유장하되 리드미컬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다. 독자들은 박학하고, 말발 좋고, 인생굴곡이 만만찮았을 이 네 선생들 사이에서 다섯 번째 자리를 마련하면서, 필요한 길을 스스로 펼쳐나가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국어사전에 추가될 단어, 내장(內張)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역사적·이론적 성찰을 깊게 할 필요가 있다. 나도 서평자보다는 대화에 끼여들고픈 ‘다섯번째’ 선생으로서 이 글을 쓴다. 음양 ‘五行’ 아닌가? 

사방선생들은 다르게 설명하지만, 內張은 비가산무한(非可算無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제논의 역설의 한 판본을 보자. 거북이 아킬레스 앞에서 가고 있다. 아킬레스가 그 간격만큼 따라잡았지만, 거북은 아직도 조금 더 앞에서 가고 있다. 아킬레스가 그 간격만큼 가도, 거북은 아직 앞서 있다. 간격은 무한히 0에 가까워지지만, 무한히 증식되어 더해지고, 그래서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을 따라잡지 못한다. 물론 아킬레스는 거북을 따라잡는다. 서구 형이상학이 이해 못한 것은 현실적으로 유한한 것이 내적으로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는 것, 또는 어떤 것이 무한히 증식해도 유한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1+1=2가 되는 자연수의 공리계에서는 연역되기 힘든 진리이다. 팽창(膨脹)이란 1+1+1+…… =∞라는 전제 아래 작동하는 산술이라면, 내장(內張)이란 Δ+Δ+Δ+……=1이라는 전제 아래 작동하는 산술이다. 1+1=2이려면, 1=1이어야 하고, 1-1=0이어야 한다. 즉, 프레게가 보여주듯, 제로나 공백, 빈칸에 대한 공리가 우선 필요하다. (사방선생들은 落差라고 표현한다.) 자기동일적인 존재자는 아무것도 없는 공백을 채우고 들어서며, 1+1=2와 같은 산술은 모두 이렇게 공백 혹은 무주지(無主地)를 전제하지 않으면 전개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장이란 유한성 속에서 끊임없이 1도 0도 아닌 ‘우수리’들이 생성되는 것이다. 내장의 산술이 어떻게 현실적 참(truth)이 되는지 이해하려면, 뉴튼의 미분방정식을 넘어 19세기 후반 이래의 수학과 과학이론의 발전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나 마투라나의 자기생산조직을 생각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팽창과 내장의 대조는 단순한 수학적·존재론적 고찰로만 머물지 않는다. 1+1+…=∞의 팽창은 서구적 사회발전에서는 정상적인 행위의 논리였다. 베버 이래 사회학자들은 서구 국민국가의 주권자가 자본증식을 꾀하는 자본가와 같은 무한증식의 논리를 따른다고 지적해왔다. 주권의 기원을 이루는 봉건제후들은 상호폭력의 가능성 속에서 상대의 폭력으로부터 방어할 폭력을 소유한 자로서 자기자신을 이해하며, 폭력수단으로 호환되는 주민과 영토를 늘림으로써 상대에게 대항한다.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모태라는 유럽의 도시들 또한 영주와 경쟁 도시에 대한 유혈투쟁 속에서 자치권과 사업권을 따낸 무장단체였으며, 폭력을 구입하고 길들이는 유동자산의 소유주들이었다. 이른바 근대국가는 자본가와 군주의 합작품이었다. 

한편 봉건제와 전국시대를 일찍 종결한 중국 및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이러한 팽창의 논리로써 정상적 통치를 이룰 수 없다는 점 역시 이해되어왔다. 월러스틴이 잘 지적하듯, 황제는 자신의 정적이나 신민들을 상대 봉건제후처럼 다룰 수 없는데, 왜냐하면 제국 그 자체가 바로 제국과 그 신민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고 재생산하는 자기지시적 그물망 전체이기 때문이다. 자기지시적 그물망 안에서 적대관계는 황제에게 독으로 돌아올 수 있고, 내부와 외부는 내부에 함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학자들은 이 자기지시적 그물망을 재생산하는 합리적인 통치·성장의 레짐을 이론화·정교화하는 데 인색했다. 베버처럼 유럽적 합리성에 미달한 주술정원으로 못박거나, 브로델이나 월러스틴 같이 신중한 학자들조차 동아시아에 유럽인들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효율적인 레짐이 있음을 손쉽게 인정하고 덮어버렸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주권국가체계가 이들의 세계 전부였고, 유럽적 가치로써 불평등을 제어하는 것이 이들의 문제의식의 거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이대로 계속 갈 수 없다. 상상과 다르게 18세기 말까지 더 늦게는 19세기 초반까지 동아시아가 농업과 수공업 분야에서 서구를 앞서 있었으며, 이른바 서구의 우위는 200년이 좀 넘거나 채 안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동아시아에 어떤 통치와 성장의 레짐이 있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앞서 있다가 산업혁명 이후 급속히 추월당했으며, 또다시 20세기 후반부터 유럽을 급속히 추월해나가기 시작했는지가 학자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프랑크, 포메란츠, 브레너, 아리기 등이 참여한 대분기논쟁이 있었다. 

게다가 이른바 근대 학문의 모태인 서구사회조차 크게 변했다. 16세기 이후 주권국가가 성립한 이래 군주권은 낡은 논리가 되었는데, 봉건제후의 후손으로서 군주의 권리란 토지와 주민에 대해 소유·양도하는 권리였고, 주민 외부의 생사여탈권에 불과했다. 군주권을 인민주권으로 거꾸로세운다 해도 그 낡음은 여전하다. 제대로 통치하자면, 통치자는 통치대상 안에 있으면서도, 더이상의 상위권력이 없는 상위권력으로서 통치대상을 통치해야 한다. 칼 슈미트가 정식화했듯이, 주권자는 주권자 안에 있을 수도 주권자 밖에 있을 수도 없는 주권자의 역설이 벌어진다. 푸코 후기 논저에서 잘 보이듯이, 군주권을 보완하는 각종 권력관계들이 모세혈관처럼 사회체 곳곳을 횡단하는데, 그것은 광범위한 생명관계를 도입하고 규율함으로써 법치에 의존하는 고대 그리스 이래의 민주적 이상을 근저에서 위협한다. 근대적 통치권력은 살게 놔두거나 죽게 만드는 생사여탈권이 아니라, 삶에 개입하는 생권력이기 때문이다. 아감벤이 벌거벗은 생명의 비식별역이라고 말하듯, 서구적 합리성은 이 상황을 이해하거나 대처하는 데 무능하다. 최근 코로나 사태 이후, 우리는 그토록 고고했던 서구적 지성의 당혹과 무능, 서구적 통치성의 위기를 눈앞에서 적나라하게 보고 있다. 

사실 이것들말고도 고려해야 할 역사적·이론적 탐색은 더 길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붕새의 날개』의 사방선생들이 제안하는 내장(內張)이란 용어가 이 모든 관심사와 문제의식을 포괄할뿐더러 적절한 방향제시마저 해준다는 점이다. 사방선생들은 기막힌 작명가이든지, 정세 파악 능력이 좋은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몹시’ 질투가 난다. 몇 년 동안 깨작깨작 비가산무한과 동아시아 통치성을 연결하는 작업을 남몰래 해왔지만, 나는 내장(內張)이라는 용어를 만들지 못했다. 내장이 어떤 것인가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헤게모니변동을 이해하는 관건일뿐더러, 생산과 소비, 분배를 조직하는 방식에 대한 성찰일 것이고, 화석연료의 대규모 사용 이전의 풍요를 성찰할 패러다임이라는 점에서 전지구적인 환경위기를 재개념화할 기회가 될 것이다. 더욱이 내장은 자연이면서 역사인 어떤 영역을 통찰하는 데 특히 무능한 서구 사회과학의 한계를 짚어 보인다. 농경을 시작한 이래, 인간이 경작하거나 돌보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재생산되기 어려운, 역사화된 자연의 영역이 생겨났다. 농경지, 농작물, 가축 등이 우선 생각나지만, 사실 특이한 진화 경로를 통해 도달한 인간 자신이 그러한 역사화된 자연의 첫 번째이며, 이 영역의 심층에 사회적 질서의 기초적인 요소들이 묻혀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일찍이 천하라는 용어로써 인간이 책임이 있는 이 자연적·역사적 관계를 통찰했다. 인류세라고 불리는 오늘날에는 그 영역이 지구 전체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듯하다. 아메리카 식민지를 보고 기뻐하던 17~18세기 유럽인들처럼 자연을 더 이상 무주지라고 생각할 수 없다. 

사방선생들은 내장하는 관계망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장자』에 나오는 붕새를 말하고 있다. 붕새는 단순한 비유 이상인데, 현실적 지시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사방선생들은 붕새가 계절풍을 지시한다는 것, 나아가 계절풍과 엮인 이 질서 전체의 흐름을 지시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말년의 푸코는 주권국가의 영토와 인구의 관계망 안에서 순환을 조직하고 평형을 조절하는 관계망을 ‘안전’장치라고 불렀다. 이것이 통치성의 핵심이고 생권력과 직결됨은 물론이다. 푸코는 생권력과 화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푸코가 고찰하는 한, 자연과 연속된 순환의 흐름이라는 문제틀이 유럽에서는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본격화된다. 오랜 봉건제와 늦은 국가형성을 생각한다면,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이 점에 주목하지 않았다. 심지어 동아시아의 푸코리안들도 마찬가지다. 사방선생들은 푸코를 애호하는 것 같지 않은데, 말년의 푸코가 고통스럽게 이른 이 지점으로 손쉽게 더 깊숙이 들어온다. 고풍스런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이론사는 ‘수력체제’를 말함으로써 분명 이 순환에 주목했지만, 동양적 전제정이라는 서구인의 오랜 편견에 굴복하며, ‘운하’와 ‘토목공사’ 정도만 말했을 뿐이다. 물처럼 흐르는 권력을 말한 『앙티오이디푸스』의 저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하지만 붕새는 운하가 아니라 계절풍이며, 시베리아 북명에서 뜨거운 남명으로 오르고, 다시 남명에서 북명으로 날아오른다. 붕새의 비행은 물의 여행이다. 바다의 물이 대륙으로 이동해 동식물을 생육시키고, 인간을 살린다. 동아시아 벼농사는 막대한 물이 필요하지만, 붕새의 운행이 이 물 조절의 상당부분을 떠맡기 때문에, 관개시설이 필요해도 스텝의 작물인 밀이 건조지역에서 재배되기 위해 관개시설이 필요한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국가권력의 조직방식도 다르고, 그 조직화를 상징하는 우주론도 다를 것이며, 국가와 民의 관계도 다를 수밖에 없다. 붕새의 비행은 인간의 여행로를 열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대륙과 바다에서 소농의 생존과 공존한 원거리무역과 그 상업자본을 가리킨다. 또 유교·불교 등 보편종교의 확산 및 문화적 삶을 가리킬 수도 있다. 요컨대 ‘내장’과 ‘붕새’는 사회과학의 세부 주제를 이루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포괄적인 틀이 된다. 사방선생들은 이 포괄적인 틀을 그 위상학적 패턴으로 포착하여 형(形)이라고 부른다. 대략 18세기까지 유지되던 동아시시아의 포괄적인 질서의 패턴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 형이 무너져 흐름들이 바뀌는 국면을 류(流)와 세(勢)로 포착해 지난 200년간의 서구우위를 기술하고, 다시 앞선 형과 위상동형인 새로운 形’로 국면이 변하고 있다면서, 최근사를 서술한다. 어마어마하게 긴데, 1000페이지가량 된다.

거듭 말하건대, 박학이 두드러지는 역작이다. 고식적 개념과 전문분야에만 몰두하는 연구자라면, 쓰기도 읽기도 힘들 책이다. 하지만 ‘너무 길기’ 때문에 내장과 붕새가 갖는 어마어마한 함의와 이론적 잠재력이 잘 조명되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 사실 이것이 굉장히 아쉬운데, 붕새와 내장은 흔히 말하는 ‘융복합’ 혹은 새로운 학문 패러다임으로서 상세하고 깊이 탐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더 있다. ‘形’을 이루는 요소들 사이의 관계가 잘 해명되지 않은 느낌이다. 정말로 내장이려면,  Δ+Δ+Δ+……=1이어야 할 것이다. 익숙한 요소들이 거론되지만, 보편종교+소농경제+근면혁명(새로운 노동윤리)+유교적 관료제+예치+조공책봉관계 …등이 어떻게 Δ+Δ+Δ+……=1의 유한성으로 깊숙이 내장될 수 있는지, 아직 잘 밝혀진 것 같지는 않다. 저자인 김상준이 이 책이 아직은 탐사보고서라고 했으니, 이 보고서를 읽은 사람들의 몫이 아닌가 한다.

 

 

김미정 단국대 강사·사회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