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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 1989
구로, 1989
  • 교수신문
  • 승인 2021.05.2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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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 지음 | 삶창 | 264쪽

1989년 구로공단에 위치한 (주)서광에서 일하던 청년 노동자 김종수가 자기 몸에 불을 붙였다. 스물네 살이었는데, 여성 사업장인 (주)서광의 노조 쟁의부장이었다. 김종수의 분신은 한국노동운동의 변곡점에 해당하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건설에 작지 않은 동력으로 작용했다. 물론 김종수는 자신의 당면한 문제인 쟁의에서 이기기 위한 몸부림에서 한 분신이었지만, 동시에 죽음을 택한 이의 내면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었다.

김종수의 분신을 회사와의 구두 합의가 번복된 데 대한 항의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조합 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업을 강행한 책임자로서, 나날이 늘어나는 조합원의 이탈과 불만을 견디지 못한 충동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여러 정황과 증언을 볼 때, 그의 분신은 스스로 노동운동에 뛰어들 때부터, 구체적으로는 『전태일평전』을 읽은 후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아니, 열다섯 살 나이로 노동을 시작할 때부터 태동하고 있었다.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절실함이 남다른 사람들은 그가 속한 사회로부터 굴종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를 강요당한다. 그 최종 선택은 본인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사회가 강요한 것이다.

1989년 5월 1일 노동절 100주년을 맞아 거행된 기념식을 당시 노태우 정권은 원천 봉쇄했다. 이에 맞서 기념식을 강행한 노동자들을 “전국에서 6500여 명” 연행했다. “이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150여 명이 부상”당했다.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사회는 ‘민주화’되었는데 도리어 노동조합은 “자본과 권력의 역공에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김종수의 분신 투쟁이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개인 김종수의 평전 형식을 띠지만, 김종수의 개인사를 시대의 흐름 위에 겹쳐놓음으로써, 한 노동자의 죽음이 시대적인 죽음임을 잘 보여준다. 저자는 김종수의 목소리를 빌어 6월항쟁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스스로 멈추어버린 역사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한다.

모든 사회계층이 우리 노동자의 투쟁을 우려하고, 반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6월항쟁으로 사회가 민주화되었다지만, 수천 개 민주노조가 만들어졌다지만, 자본과 권력의 역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음에도 언론은 노동자 이기주의가 나라 경제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몰아세우고, 많은 국민도 그렇게 생각해. 민주화를 요구하며 싸웠던 야당과 그 지지자들까지 그래.

이 책은 청년 노동자 김종수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이후 1991년 사태에서 나타나듯이 사회운동 전체가 노태우 정권의 탄압에 몰락하는 서막에 해당된다.

기계가 아닌 존엄한 인간으로 살고 싶다

김종수는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에서 태어나 자라지만 가난 때문에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인정 많고 자애롭던 아버지도 가난의 무게에 꺾여버리자, 김종수는 중학교를 미처 마치지 못하고 공장 생활을 시작한다. 그가 처음 일한 곳은 대구의 제빵공장이었는데, 돌아온 것은 ‘노예생활’이었다. 그런데 이 제빵공장의 사장은 “아는 사람”이었다. 이에 대해 저자 안재성은 마치 19세기에 쓰여진 보고서처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장들이 나이 어린 노동자를 고용하는 이유는 동정심도, 도와주기 위함도 아니었다. 기술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밥만 주거나 용돈 정도만 주고 부려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사장의 인품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본 자체가 이윤을 위해 탄생하고 존재했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도,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조차 자본가의 입장이 되는 순간 자본의 속성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자본의 논리에는 일말의 인정도 사정도 들어갈 틈이 없었다. 오로지 생산원가를 절감하려는 냉정한 계산만이 적용될 뿐이었다. 그리고 생산원가 중에서 가장 손쉽게 깎아내릴 수 있는 게 임금이었다.

이런 자본의 논리가 김종수의 삶 전체를 관통했다. 스무 살이 되어 서울의 평화시장에서 일하게 되지만 전태일이 분신으로 고발한 노동환경은 전혀 나아진 게 없었다. 동생과 친구들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김종수는 구로공단에 있는 (주)서광으로 일터를 옮기지만, 평화시장과는 또다른 조건에 처해지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좋아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철저한 라인 작업을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공장 조건을 말하는 것뿐이다.

와이셔츠 하나를 만들어도 앞판, 뒤판 붙이는 사람 따로 있고 팔은 팔대로, 주머니는 주머니대로 붙이는 사람이 따로 있는 식이야. 재단반에서 필요에 따라 재단한 원단을 2층 봉제반으로 올려 보내면 라인을 따라가는 사이 하나씩 재봉질로 봉합해 맨 마지막으로 단추를 달아서 다른 건물에 있는 완성반으로 내려 보내는데, 라인을 따라 밀려오는 일감을 처리하지 못하면 다음 공정까지 마비되니 온종일 정신없이 일해야 하는 거야.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어디선가는 정체될 수밖에 없으니 반장, 조장들의 고함과 욕설이 끊이지를 않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중이 사라진 노동조건 속에서 김종수는 전태일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동안 자신 안에 쌓였던 설움과 분노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른바 각성한 노동자로 다시 태어나지만, 각성은 현실의 높고 두꺼운 벽과 싸울 수밖에 없게 만드는 법이다. 책의 중반부터는 김종수의 투쟁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김종수의 출렁이는 내면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순결한 인간이 갈 수 있는 길은 현실에서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1989년 구로공단 지역 전체가 뜨거운 투쟁의 열기로 덮였을 때, 김종수가 일하던 (주)서광은 노동조합과 구두로 합의하지만, 갑자기 약속 내용은 번복하고 만다. 이 번복을 저자는 그 당시 노동자들의 취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노동부에서 무노동 무임금 원칙 지키라고 명령이 내려온 게 틀림없어!” 그 당시 노태우 정권에서 노동조합에게 ‘무노동 무임금’을 강제 적용시킨 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최후의 저항으로 김종수는 분신을 택하게 된다.
김종수는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인간다운 존중을 받는 일의 지난함을 알았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본이 노동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일 텐데, 그 자본의 태도를 ‘인간적으로’ 통제해야 할 국가와 정치가 그것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김종수는 알았던 것이다.
저자 안재성이 김종수의 삶을 취재하고 쓴 이 책의 결론은 너무도 고색창연한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는 것이다. 이 외침은 자본주의 시작과 더불어 지금까지 반복해서 울리는 존재의 함성이기도 하다. 뒤집어 말하면,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기계처럼 대하지 않고서는 지속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김종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동자의 희생 위에 경제가 좋아진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외국 도시에 서 있는 삼성이나 럭키금성의 광고판을 보고 민족적 자부심은 느낄지 몰라도, 그 회사들이 내 것이라도 되는 양 흥분하는 바보는 아니야. 도로에 늘어나는 고급 승용차들이며 치솟는 고급 아파트 어느 하나도 자기 소유가 아닌데, 우리나라는 부자 나라라고 자부심을 갖는 바보 같은 서민으로 살지는 않을 거야. 나는 나라가 부유해지려면 노동자가 더 희생해야 한다는 가진 자들의 논리를 용납할 수 없어. 불평등과 억압을 받아들이도록 교묘하게 설득하는, 많이 배운 자들의 위선을 용서할 수 없어.
그런데 이 외침은 아직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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