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6 12:55 (화)
젊은 욕망이 자라게 하라
젊은 욕망이 자라게 하라
  • 한명숙
  • 승인 2021.05.26 08: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학정론_ 한명숙 논설위원 / 공주교대 국어교육과 교수

 

한명숙 논설위원/공주교대 국어교육과 교수

20세기까지도 인류는 스스로가 이성적 존재라고 믿어 왔다. 무의식을 발견한 프로이트의 충격이 있었어도 인간은 여전히 이성적 판단을 따른다고 믿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코기토가 굳건했다. 비록 ‘갈대’라 하여도 사유한다는 점에서 위대한 것이 인간이었다. 

21세기의 인류는 안다. 이성만이 인간의 판단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제로 호모 사피엔스에게 생각이나 이성이 그 위상만큼 강력하지 않다. 뇌과학 분야의 연구로 알려진 사실이다. ‘감정, 이성 그리고 인간의 뇌’라는 부제를 달고 재출간한 《데카르트의 오류》(안토니오 다마지오 著)도 보여 준다. 인류의 뇌가 이성 못지않게 몸과 감정, 욕망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을 알게 한다. 감성 마케팅도 이에 근거한다.

인류는 욕망하는 생명체다. 스피노자는 욕망을 ‘자기가 존속하려는 자기 안의 노력’으로 보았다. 이후 정신분석학의 발달에 따라 욕망이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충동이 아니라, 독자적 법칙이나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내면의 힘이라고 인식한다. 인간을 ‘욕망 기계’로 본 들뢰즈의 철학은 이 인식을 잇는다. 욕망이 생성의 강도(intensity)가 된다. 어떤 차이에서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하여 작용하는 에너지이며, 변화와 생성의 동력이다. 이 차이가 ‘강도’이니, 이 세상의 모든 차이는 힘을 갖는다. 차이가 없는 세상이 없으므로, 차이와 ‘강도’는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와 만난다. 욕망으로의 영원 회귀.

욕망은 욕구와 다르다. 그동안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온 것들을 욕구로 돌려보낸다. 남겨진 욕망을 세우면 그로부터 생명체가 존속하기 위한 힘이요, 의지요, 노력이 나온다. 이에 따라 인간을 이해한다. 어떤 욕망은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어떤 욕망은 무소유를 꿈꾼다. 『천 개의 고원』을 쓴 욕망은 인간 사유의 히말라야다. 최근에 이삼십 대 젊은이들의 ‘영끌’, 주식·코인 투자는 이 모양의 세상에서 존속하기 위한 노력이요, 존재론적 욕망이 아닌가! 생장의 욕망!

미래의 지구는 호모 사피엔스의 욕망이 더 강하게 출렁이는 세상이 될 전망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는 충격 메시지를 받은 이후, 자기 존속을 위하여 몸부림치기 위한 욕망의 변주를 시작한다. 슬픈 욕망을 가진 이는 슬퍼야 살고, 차가운 욕망을 가진 이는 차가워야 산다. 변이를 거듭하는 바이러스처럼 인류도, 한국의 젊은이도 변이와 변화를 모색하며 살아나가기 위해 애쓴다. 

욕망은 건강하다. 욕망은 절제와 억압의 대상일 수 없다. 그것은 문제 해결의 토대이며, 이해와 인정, 보호와 보전의 역동성이자, 탐구와 충족, 표현과 해소, 창조와 생성의 가능성이다. 유토피아를 꿈꾸며 디스토피아적 세상을 살아내려는 혼신의 안간힘이다. 치솟아 흐르는 물이 없으니, 그 눈물겨운 노력에 투영된 욕망을 봐야 한다. 자식이 부모의 거울이듯,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거울이다. 세대의 시간을 비추는 거울 속에 무엇이 보이는가? 

성찰의 시간! 빛이 만들어 놓은 그림자를 냉정히 돌아보라. 욕망하는 자아들의 신진대사를 살펴라. 세대의 관점에서 욕망의 청사진을 만들라. 현세의 차이를 반영하고, 후대가 살아갈 새로운 차이를 만들라. 과거는 향수요, 미래가 현실이다. 더 많이 살아온 이들이 더 많이 살아갈 이들에게 물려주라. 가지려는 노욕은 욕망이 아니다. 생장이 멈춘 무의식의 욕심…. 우주는 지금도 욕망이 자라나는 무한 세계다.

한명숙 논설위원
공주교대 국어교육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