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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존재의 가능성 본 철학…루카치와의 투쟁의 산물
미래존재의 가능성 본 철학…루카치와의 투쟁의 산물
  • 김진 울산대
  • 승인 2004.11.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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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서평_‘희망의 원리’(에른스트 블로흐 지음, 박설호 옮김, 열린책들 刊, 2004)

에른스트 블로흐는 철학사에서는 주의 깊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희망 개념을 분석하고 있다. 서구에서의 희망은 주로 유대-기독교적 전통에서 중시되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중세철학자들이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기획하는데 주로 활용하였다. 희망 개념에 대한 철학적 위상을 처음으로 정립한 철학자는 바로 칸트였다. 그는 이론적 지식, 도덕적 실천, 종교적 희망의 가능성 조건과 관련된 철학의 세 영역을 구획지우면서, “우리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블로흐는 희망의 개념을 수많은 철학적 주제들 가운데서 하나가 아니라 철학 그 자체의 물음으로 다루고자 하였다.

블로흐의 희망철학은 단순히 인간의 소망에 대한 백과전서적 기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화이트헤드가 서구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평가하였던 바로 그 본질철학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의미한다. 블로흐는 이미 있었던 존재자의 본성을 다루는 과거지향적 본질철학 대신에 아직 존재하지 않은 미래존재의 가능성에 대한 철학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과거의 이상을 표준으로 요구하였던 회상(anamnesis)의 철학은 도래하는 존재의 가능성을 예견하는 희망(spes)의 철학으로 전환된다. 이로써 블로흐는 플라톤에서 칸트와 헤겔에 이르는 서구의 전통철학을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인간의 근본충동은 '리비도'가 아닌 '굶주림'

블로흐는 칸트의 희망철학을 마르크스주의와 결합시켰다. 물질론적,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이 도입되면서 블로흐의 희망내용은 칸트의 것과 달라진다. 블로흐는 칸트의 의무윤리학이 프로이센 제국의 착취 이데올로기로서 작동된 사실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다. 바로 그 때문에 블로흐 자신도 이데올로기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버마스는 다른 모든 사상을 비판적으로 재단하고 있는 블로흐의 유토피아 사상 역시 타자의 관점에서 또다시 비판의 대상으로 상정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칸트의 청중이 프로이센 제국의 백성들이었던 것처럼 블로흐의 철학적 메시지 역시 장벽 설치 이전의 동독 주민들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로흐의 희망철학은 지금까지 전혀 거론되지 않았던 인간의식의 경향성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으며, 그것은 프로이트와 융에 의하여 확립된 무의식의 심리학에 대한 비판적 접근으로부터 출발한다. 블로흐는 무의식과 리비도를 前의식과 굶주림으로 대체한 점에서 정신분석학자들과 차별화된다. 무의식은 과거에 발생하였던 사건에 대한 감추어진 의식으로서 “더 이상 의식되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 “아직 아닌 존재”에 대한 예견과 선취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과거사실을 지향하고 있는 무의식이 아니라 예견의식으로서의 “아직 아닌 의식”이다. 그리하여 아직 아닌 존재는 우리에게 “아직 의식되지 않은 것”으로 서 있다. 블로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충동을 리비도가 아닌 굶주림으로 규정한다. 하버마스는 블로흐가 이 굶주림의 개념을 야콥 뵈메에게서 차용했을 것이라고 본다.   

▲'희망의 원리' 원고 ©
아직 아닌 존재에 대한 분석은 “낮꿈”을 매개로 한 새로운 존재론의 수립을 요구한다. 밤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심리적 파편에 불과하다면, 낮꿈은 아직 아닌 것의 실현 가능성에 관련되어 있다. 그동안 인류가 창출한 모든 유형의 소망 범주들은 바로 이 낮꿈에 속한다. 블로흐가 철학과 정치사상뿐만 아니라 동화에서 유토피아소설에 이르는 다양한 문학 장르, 그리고 예술, 종교, 건축, 지리, 영화작품까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것은 그런 낮꿈들 속에 유토피아적 현재가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현실과 매개되어 있다. 이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위하여 블로흐는 아랍철학자들을 계승한 아리스토텔레스좌파의 물질론에 착안하는 동시에 기존의 사회유토피아론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연계함으로써 구체적인 유토피아론을 정립하게 된다.

세계역사는 구체적 유토피아가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살고있는 순간의 어두움”으로 인하여 그것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미리 드러남”의 범주에 의하여 예견하고 선취할 수 있다. 블로흐의 구체적 유토피아론이 지향하는 바는 칸트의 최고선, 마르크스의 자유의 나라, 기독교의 하느님의 나라가 결합된 형태이다. 그것은 물질에 담겨진 가능태가 완전하게 실현된 상태이며, 하느님은 죽었지만 하느님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인간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다시 말하면 하느님이 없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블로흐가 유대신비주의, 물질론, 그리고 페르시아 이원론을 기독교 해석의 원리로 채택한 결과이기도 하다.

인간이 신적인 상태에 도달한 유토피아론 펼쳐

현실 개념에 대한 블로흐의 철학적 이해는 사실주의를 지지하는 루카치에 반대하여 표현주의 쪽에 기울게 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부터 두 철학자는 표현주의 논쟁에 빠지게 된다. 블로흐는 과거적인 緣起 사실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현실보다는, 아직 한 번도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이상이 “물질의 가능성”이라는 화폭 위에 그 자태를 미리 드러내고 있는 사실을 더 중시하였다. 따라서 블로흐는 표현주의에 더 치중할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초현실주의까지 지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블로흐의 표현주의 및 초현실주의는 유토피아적 질료가 이루어 놓은 현실지평 위에서 구상된 것이므로 과거사실을 혁명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런 사실에서 루카치는 표현주의가 낭만주의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공허한 열정과 주관적 관념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른바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라고 매도하였다. 혁명적 과제와 당위를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이나 미래 유토피아의 예견적 묘사가 추구하는 지향성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루카치와 블로흐는 우정을 버리면서까지 투쟁하게 된 것이다.   

블로흐의 철학적 지형도는 다음과 같이 그려질 수 있다. 그에 대한 이념적 공세를 주저하지 않았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철학은 유토피아의 선험적 구조에만 치중한 느낌을 준다. 현실적인 의사소통공동체의 존재와 이상적인 의사소통공동체의 실현을 동시에 요청하였던 아펠은 하버마스보다는 훨씬 더 우호적이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하느님의 나라를 강조하지만, 블로흐는 그런 경우가 온다면 인간이 신적인 상태에 도달한 자유의 나라 혹은 하느님이 없는 하느님의 나라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블로흐가 구상한 마지막 세계의 모습에는 유토피아적인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 즉 절대절멸의 가능성이 추가된다. 그리하여 생태형이상학자인 한스 요나스는 유토피아론에 대한 “희망의 원리”보다는 “책임의 원리”가 선결과제라고 본다. 끝으로 블로흐가 10년 넘게 저술한 책을 10년에 걸쳐서 우리말로 옮긴 역자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김진/울산대·철학
필자는 독일에서 ‘칸트의 요청이론: 에른스트 블로흐에 의한 그 수용과 불교해석을 위한 적용 가능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의 희망철학적 해석’등의 논문이, ‘퓌지스와 존재사유: 자연철학과 존재론의 문제들’, ‘칸트와 생태사상’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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