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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21세기 색채의 시대-①색채 관리의 현주소
[테마] 21세기 색채의 시대-①색채 관리의 현주소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1.05.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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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17 13:11:53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흑백에서 칼라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색채는 기술산업의 발전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가 되었다. ‘디자인의 소프트웨어와 색채과학 기술의 하드웨어’가 결합된 색채산업은 21세기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산업뿐 아니라 문화와 의식, 심리 등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색채가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색채 산업의 수준은 어디까지 와 있을까. ①색채 관리의 현주소 ②인간과 색, 색의 철학 ③산업으로서의 색 ④색채 교육의 점검 총 4회에 걸친 색채기획을 통해 우리 색채 관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색채 인식을 점검해본다.

●불그무레하다(옅게 불그스름하다), 불그숙숙하다(수수하게 불그스름하다), 누르께하다(곱지도 짙지도 않고 누르스름하다), 누르퉁퉁하다(맵시가 없고 산뜻하지 않게 누르다), 푸르죽죽하다(빛깔이 고르지 못하고 산뜻하지 않게 푸르스름하다), 푸르데데하다(천하게 푸르스름하다)….
국어사전을 보면 ‘붉다’, ‘누르다’, ‘푸르다’에서 갈래 뻗은 형용사가 큰말 작은말 합해 수십 여 가지이다. 빨강, 노랑, 파랑, 한 가지 색으로 표현한 단순한 교과서가 무안하도록, 짙고 옅음에 따라서, 빛의 양에 따라서, 그리고 보는 이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색은 다양하게 나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아직 고유한 색 체계가 없다. 색 갈래 말이 이토록 다양한 나라에 고유한 색 체계가 없다는 것은 사물의 무게(kg), 크기(inch) 혹은 거리(km) 등, 정확한 도량형을 따지지 않는 우리 민족성과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늘, 바다, 들을 모두 ‘푸르다 ’고 표현하지만, 서양에서는 ‘sky blue’, ‘marine blue’, ‘field green’ 등 미묘한 차이를 구분해 이름 짓는다. 이화여대 김영기 교수(정보디자인과)에 따르면 ‘푸르다’는 말에는 빛깔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심리 상태까지 들어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우리의 색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색이 아니라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색인 것이다. 논리적인 색 체계를 세우지 못한 이유로 이런 전통도 지적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표준 색체계는 먼셀 시스템(Munsell System-색을 색상(hue), 명도(value, lightness), 채도(chroma)의 3가지 감각적 속성으로 나타내는 체계로, 사람의 색채시감과 비교적 가까운 색좌표계로 평가받고 있다)이다. 전문가들은 먼셀 시스템의 장단점이나 다른 체계의 유용성에 대한 검토가 거의 없는 상태를 지적하며, 색 체계의 국가 표준 문제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50년만에 지정된 ‘태극기 공식 색상’
우리나라의 색채 개념이 어떤 수준인지는 나라의 상징인 태극기를 통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태극의 색과 4궤의 색은 국기마다, 교과서마다 달랐다. 태극기의 공식 색상을 정한 것은 불과 3년 전인 1998년이다. 1949년 1월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해 10월 15일에 오늘날의 ‘국기제작법’을 확정·발표한지 50년만의 일이었다.
기본적인 색채 관리가 이쯤 되면 ‘색채과학’, ‘색채산업’이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패션, 디자인 등 21세기 고부가가치 산업에서 색은 제품 생산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다. 색깔 하나로 몇 배의 고부가가치를 창조한 예는 무수히 많다. 고부가가치 산업이 앞선 나라들이 1세기 전부터 고유한 색 체계를 만들어놓은 것에 비추어볼 때 세계 시장에서 우리 색채 관련 산업은 1백년 정도 뒤져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색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 문제가 된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화가의 작품집이나, 전시회의 도록 같은 경우 실제 그림과 색이 다른 경우는 허다하고, 칼라 인쇄물의 경우 판마다 색이 다른 경우도 많다. 문제는, 색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까다로운 외국 상인들의 요구에 맞는 색채를 찾지 못해 40번이나 반송 당한 원단 수출회사의 이야기는 한국 기업의 뼈아픈 현실로 들린다.
우리는 화려한 색채전통을 가진 민족이다. 쌍영총, 무용총, 동명왕릉, 안악 고분 등 고구려 무덤의 벽화에는 현대 회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다채롭고 화려한 색이 펼쳐져 있다. 담백한 초·중기를 지나 짙고 강렬한 고구려 후기 벽화에 이르면 우리 민족이 색채 사용에 있어서 얼마나 능수능란 했는지를 여실히 볼 수 있다. 홍, 황, 백, 흑, 녹, 자색 등은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쳐 우리 전통색으로 자리잡았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백의민족이다’라는 명제는 백성들의 색채 사용을 막는 봉건제의 전횡에서 나온, 잘못된 통설이라는 입장에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백의민족’이 아니다
색채는 인간의 감각 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부분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주택 건설이나 도시계획에서도 색채 선택은 굉장히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색채의 좋고 나쁨이 사람들의 감성·의지·행동에까지 미묘한 영향을 주고 특히 색채의 생리·심리적인 영향은 어떤 물리적 자극보다 크게 작용한다고 본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색이 빨강이라는 색채 선호도 조사(한국색채연구소, 1997년)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오랜 반공 이데올로기를 말해 준다. 색채가 인간의 무의식에까지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다. 이렇듯 색은 산업 뿐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색 체계의 논의와 함께 색채교육 점검 또한 필요하다. 초등학교 3학년 미술 교과서에는 빨강, 주황, 노랑, 연두, 녹색, 청록, 파랑, 남색, 보라, 자주 10색상환만이 나온다. 일본 초등학생들이 84색을 배우는 것에 비하면 너무 적은 수이며, 창의적이어야 할 미술 교육 역시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색채의 기본을 세우고 색채 전통을 되살리는 것은 곧 고부가가치 산업을 발달시킬 수 있는 길이며, 문화적 감성을 발달시키는 길이다. 색채 표준화 연구와 함께 색감을 일깨우는 교육이 절실한 까닭이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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