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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쟁점 : 조선 지식인 지도 새롭게 그린다
학술쟁점 : 조선 지식인 지도 새롭게 그린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11.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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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동양사상』논쟁- 조선유학사 인식체계 요동쳐...퇴계, 心學으로 볼 수 있는가

동양철학계가 꿈틀꿈틀 거대하게  일어서고 있다. 해방 이후 지난  50여년간 축적해온 학문적 蘊蓄을 통해 드디어 조선철학사 전반을 재검토하는 작업에 본격  돌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영식 울산대 교수(동양철학)는 “현재 戰線이  있다. 기존 이론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동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라면서 마치 선전포고하듯이 비장하게 말한다.

반년간지 ‘오늘의 동양사상’(예문서원 刊)을 그동안 눈여겨본 독자라면 이런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잡지에서 지난 2001년 ‘퇴계학의 존재를 묻는다’라는 홍원식 계명대 교수의 글로 촉발된  논의가 이번 겨울호에까지 논쟁적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긴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배경설명이 필요하다.

먼저 主理(보수적-이상적-비독창적)와 主氣(진보적-현실적-독창적)의 대표선수로 퇴계와 율곡을 세우고 철학사를 갈라놓는 다카하시 도루 식의 견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들이 근래에 있어왔다. 조선 선조 때부터 ‘무림사천왕’이라 해서 ‘퇴계, 율곡, 남명,  화담‘ 등 巨峰들이 갈려져 나오는데 이들을 모두 ‘주자학’이란 테두리 안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문제제기도 함께 제기돼 왔다. 손영식 교수가 남명 조식을 “주자학과  별개의 노선을 걸어 독자적 심학을 완성한 인물”로 새롭게 규정한  것, 정원재 서울대 교수(동양철학)가 율곡이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있다”라며 “理의 주재로 세상을 본  주자의 시각을 거부해 ‘지각론’을 세웠다”라고 주장한 것이 그것이다.

이런 학계 내부의 은밀한 연구동향을 예의 주시하던 홍원식 계명대 교수가 “아, 이건 아니다”라며 들고 나온 것이 주자학과  퇴계학, 양명학과 퇴계학의 차별화 작업이다.  홍 교수의 글에 깔린 것은 주리·주기론의 틀을 깨고 퇴계학의 본령을 보려는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퇴계를 내버려 둔 채 남명과 율곡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은 퇴계를 주자의 품에 더욱 안겨주는 ‘역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  그의 중심 논지였다. 그래서  홍 교수는 퇴계가 주자 철학의 ‘리의 드러남(發)’을 ‘리의 움직임(動)’이라는 리동설로 강화시켜 계승하고, 그럼으로써 주자학을 한국적 실천철학으로 변형(transformation)시켰다는  說을 제기했다.

또한 퇴계의 철학은 세계를 조망하는 성리학이 아니라, 인간 내면을 파는 학문으로서의 성리학이라는 의미에서 ‘心學’이라 규정하고  나섰다. 그런데 논란이 된  부분은 우리가 ‘양명학’이라 알고 있는 왕양명의 철학도 ‘내면’을 중시한 ‘心學’이며 중국에서 실제로 그렇게 불린다는 점이다. 따라서 주자를 계승했다고 평가받는  왕양명 등 明대의 신유학자들과  퇴계가 어떻게 다른 지를 규명하는 것이, 퇴계를 주자의 아류라는 세평에서  구해내는 최우선의 화두로 떠오른 것이 대강 2003년 말의 일이다(모종삼, 뚜 웨이밍 등 세계적 석학들이 만들어 놓은 통설은 퇴계가 리의 창조적 활동을 강조함으로써 양명학적 라인에 접근했다는 시각에서 그치고 있다).

이번 ‘오늘의 동양사상’ 가을·겨울호에서는 홍 교수의 ‘퇴계 이황 새롭게 보기’의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한 손영식 교수의 파상공세가 이어졌다. 또 그에 대한 홍 교수의 답변이 함께  실렸다. “마치 융단폭격을 받는 것 같다”라는  홍 교수의 말마따나, 손  교수는 크고 작은 50여개의 질문을 홍 교수에게 던졌다.

그의 질문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홍  교수가 주자와 구별되는 퇴계 철학의 차별화를 내세우면서 자신의 학설보다는 기존의 퇴계에 대한 학설에 기대고 있어 모순되고, 공허하다는 것 △조선 성리학은 현실의 당파성과 떼어낼 수 없는데,  퇴계 철학의 역사적 성격을 밝히는 글에 대해서 왜 그렇게 겁을 내는가. △리와 기는 운동할 수 없는 것이다. 리는 형이상자이기 때문에 리가 몸에 부여돼 性이 될  때 가까스로 드러날(發) 수 있을 뿐이다. 퇴계도 체와 용을 구별하며 體로서의 리는 用일 경우에 ‘움직일 수 있다’라며 주자의 견해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홍 교수는 답변은 다분히 방어적이다. 기존의 주장보다 발전된 퇴계 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 비교고찰은 아직 내놓지 않고 기존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양명학(심학)과 퇴계학의 차별성에 대해서도 답변을 하지 못했고, 또한  ‘리의 움직임 여부’에 대해서는 “당시 퇴계의 주장에 대해 기대승이 주자의 책을 들이대며 강하게 비판하자 퇴계가 한발  물러선 것이지 퇴계의 속마음은 ‘움직임을 강조하려는 것’에  있었다”라는 요지의 답변을 했다.  그리고 퇴율을 비롯한 조선철학의 ‘역사성’은 정치적 사건과 단순히 결합, 해석돼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이 지점에서 또 다시 살펴야 하는 것은 홍 교수가 최근 “오히려 율곡이  퇴계보다 주자학에 가깝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논쟁을 지켜본 장윤수 대구교대 교수(동양철학)가 후원한다. 즉, 율곡이 자신과 주자가 다르다고 말을 했더라도, “그의 전체 사상체계로 볼 때 주자학을 많이 따르고 있다는 건 사실”이라는  것. 이에 대해 “왜 율곡이 말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로 해석하냐”는 것이 이번 손영식 교수의  글에 동양철학자들의 글읽기 전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차원에서 강하게 거론되고 있다.

손 교수는 더 나아가 동양철학의 용어의 사용이나 범주의 구분  등에서 전혀 학문적 합리성을 갖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즉, 理, 氣, 發,  動 같은 성리학의 ‘은유’를 학자 개개인이 이해한 대로 현대어로 다양하게 번역해서 사용해야 서로의 차이가 분명해지는데, 이런 작업을 안하고 있으니 혼란스럽고 발전이 없다는 자탄이다. 이에 대해서는 홍 교수도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고 적극 동조한 상황이다. 이번 논쟁을 계기로 앞으로 ‘무림사천왕’을 둘러싼 이해가, 특히 율곡과 퇴계가 주자학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서 학계의 논의가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예상이 가능한 이유는 한형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동양철학)가 이번  ‘오늘의 동양사상’ 가을·겨울호 논단에 ‘조선 유학의 지형도’라는 매우 문제적인 글을  기고했기 때문이다. 275쪽에 실려 있는 이 글은 앞쪽에서 자그마한 자구와 글귀 하나를 가지고 학자들이 치열하게 해석논쟁을 벌이는 풍경과는 정반대로 거시적 작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르게 조선유학자들을 독창적인 분류법에 따라 재배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성리학을 유기학, 주기학, 주리학, 실학, 유리학, 기학으로 나눈 뒤 여기에 속하는 학자들이 현실을 보는 시각, 삶에 대한 태도, 마음의 덕성, 정치적 성향, 직업 등에서 어떤 차이점을 가지는가에 따라 그룹을 새롭게 묶어 ‘조선 지식인 지도’를 그린 것이다. 가령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은 한 교수의 분류에 따르면  “둘 다 주리론이고, 현실에 대해 좌절했고, 은둔했으며, 자기규율을 중시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정치 성향이 퇴계는 개인주의적, 남명은 원리주의였다는 측면에서 다르다”라고 정리된다.

우선 주목할 것은 이 도표의 ‘도발성’이다. 통상적으로 학자들을 연관시키고, 차이화하는 기준으로 작용해온 것은 스승과 제자 같은 ‘학연’, 지역과 다분히 연관된 ‘학맥’, 위대한 성현과의 관련 속에서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면서 그려지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런 분류법 체계가 그동안 거의 불변의 법칙, 아니 인식론적인 에피스테메로 기능하던 것이었다는 점이다.

한 교수의 이번 논문은 이런 에피스테메에 균열을 일으키고 덕성, 정치적 성향 같은 철학형성의 또 다른 주요한 요소들을 뽑아 조선철학을 재분류했다는 점에서, 한 손엔 ‘푸코’를 다른 한 손에는 ‘데리다’를 들고 지난 5백년을 휘저은 셈이다. 이른바 ‘조선 형이상학’의 재구축이라고나 할까. 이것은 손영식·정원재 교수 등이 “이황은 성리학, 조식은 양명학, 이이는 호남학, 서경덕은 자연학” 하면서 주자학을 사등분한 것에도 심장이 뛰는 주류 학계에서 볼 때는 매우 충격적인 사태로 다가올 듯하다. 그러나 학맥과 학연이 조선시대 학문하기를 지배한 멘탈리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분류 자체는 앞으로 매우 격렬한 논쟁을 불러올 것으로 예견된다.

“리기론의 용어들은 애매하고 미끄럽다. 이리 당기면 가로 曰이고 저리 당기면 날 日이다. 그래도 이 용어들이 무언가를 의미하고 있기에 이런저런 주장도 하고 비판을  하는 것이리라. 그런 믿음으로 그들 사유의 의미와 함축을 캐고, 좌표를 그리고 지우기를 했다”라고 한형조 교수는 밝히고 있다. 앞으로 이에 대한 학계의 반응이 어떻게  전개될 지 매우 궁금하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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