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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서 죽이는 불법복사, 문화운동으로 돌파해야
학술서 죽이는 불법복사, 문화운동으로 돌파해야
  • 최철규 기자
  • 승인 2004.11.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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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진단_학술출판의 발전을 모색한다-(2)구조적 문제점검

학술출판 위기의 결정적 요인은 책을 사지 않고 복사해서 보는 것이다. 40명이 듣는 수업에서 교재를 직접 산 학생이 단 1명이라는 점, 법에 걸리지 않고 복사하려면 20명이 팀을 짜서 부분복사를 한 다음 합치면 된다는 식으로, 불법복제 단속망을 피해나가면서 근절돼야 할 무단복사 문화는 더욱 끈질기게 음성화되고 있다.

문제는 아무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복사료를 지불하고 이용하는데 무슨 문제냐는 주장부터, 꼭 구입할 만큼 ‘필요한’ 책이 아니라며학술서를 은근히 경시하는 태도도 한몫한다. 지난 한해 한국복사전송권관리센터가 적발하고 압수한 불법복사물 중 학술서는 모두 1천8백2종이나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한해동안 복사되는 저작물의 총량 가운데 90% 이상이 대학(원)생·교수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고 산업연구원의 통계조사는 밝히고 있다. 대학생 1인당 연간 제책된 복사본을 8권씩 보유하는 것으로 가정하고 전문도서 1권당 평균 정가를 약1만8천원으로 할 경우, 복사본으로 입은 연간 총 손실은 약3천24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인세가 10~15%라면, 약 3백~4백50억 원이 저자의 손실이다. 출판사의 출고가가 정가의 70~80%일 때는, 약2천1백억 원에서 2천4백억 원 정도가 출판사 손실이다.

가장 큰 문제는 학술서의 생산자와 소비자인 교수-(교수)학생이 복사가 학계 ‘共滅’의 길이라는 점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적당한 교재가 없다’, ‘값이 비싸다’ 등의 이유는 물론 납득이 가지만, 그 부메랑이 학술출판의 토대붕괴로 이어져 출판을 통한 학술행위의 발전과 심화에 심각한 장애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학계 전반의 공론화가 없고, 인식의 시도도 없다.

그러니 몇몇 교재출판사 중심으로 불법복사를 법으로 막으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주요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이 제외된 교재출판사들의 대응만으로는 복사주체들을 ‘문화적으로 설득’할 명분이 서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다. 가령 지난해 단속된 1천8백2종의 책 가운데 까치, 한울, 나남출판 등 주요 학술출판사의 책은 거의 없고 각종 연구원이 펴낸 책들, 교재만 펴내는 출판사의 책들만 무더기로 적발돼 있으니 제대로 단속한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즉, 학술출판의 모든 주체가 복사행위 근절에 적극 참여하지 않고 있으며, 참여할 명분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

복사를 부추기는 또 다른 이유는 학부제 정착 이후 전공필수 과목이 대폭 축소돼 학술서 수요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폭넓은 사유와 다양한 교수법이 모색되는 교양 과목에서는 교재 및 고급 이론서에 대한 의존률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강신준 동아대 교수(경제사)는 “텍스트를 통한 교육이 아니라 슬라이드나 시청각적 교육 기재 등의 활용이 부쩍 늘었고, 학생들이 인터넷 등을 통해 수집한 자료를 근거로 진행되는 강의가 늘고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학술서의 ‘찬밥신세’는 저술의 생산과 판매에 들어가는 교수들의 경제적 비용을 증대시켜 저술 동기를 근본에서부터 침식해 들어간다. 결국, 대학내 불법 복사가 교수들의 저술 창작 의욕과도 직결됨으로써 양질의 학술담론 생산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다.

불법복사 문제를 막기위해 애써온 강희일 다산출판사 대표는 “저작권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감각뿐만 아니라 대학 사회에서 자행되는 불법 행위 규제에 교수나 교육부의 민감성이 결여된 것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세명대 김기태 교수(출판학)는 “당장 학제를 개선하기는 어렵겠지만, 교수들이 교재에 충실한 강의를 하며, 책의 중요성을 설파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책을 안 사보는 이유는 국내저작이나 번역서들의 질적 하향화와도 연결된다. 유용태 서울대 교수(동양사)는 “개설서로 쓸만한 적당한 책이 없어 논문 위주로 수업을 진행한다”라고 말한다. 이는 과도한 행정 부담으로 학자들이 좋은 교재 집필을 못하고 있다는 점과 연결된다. “학과 업무, 학회의 연구비 정산 등 잡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10시나 11시에 퇴근하기 일쑤다”는 홍승우 성균관대 교수(핵물리)의 얘기가 그렇다.

따라서 생산자 측의 경제적 피해만을 강조할 수 없는 것이 책의 질을 높이기 위한 출판사와 저자의 노력이 일천한 현실 때문이다. 아무튼 학술서 최대시장인 대학에서 외면받고 있는 이 기막힌 현실의 이면에 도사린 근본적인 문제를 해명하지 않고는 학술출판의 미래를 말할 수 없다는 게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여기엔 교수들의 책임도 크다. 동료 교수들의 저서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 때문에 ‘편집교재’가 더 성행하는 측면이 있다. 또한 ‘조순·정운찬’ 등 한 학파의 ‘대부’가 아니면 아무리 좋은 책을 내도 시장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도 겹쳐있다. 아진출판사의 김근배 대표는 “한 교수가 쓴 컴퓨터 서적이 주변의 호평을 받았는데, 타 학교에서는 아예 취급도 못 받아 씁쓸했다”라고 얘기한다.

이렇듯 불법복사 및 학부제, 논문 중심의 업적평가제 등 구조적 제한에 따른 학계의 교재 저술기피 현상, 나아가 학술서가 독자들에게 시대를 헤쳐나갈 지혜와 안목을 길러주지 못하고 비슷한 얘기를 반복하고, 외국의 이론들만 그야말로 ‘번안’해내는 데 머무르는 문제 등으로 인해 학술출판의 문화적 중량감이 더욱 가벼워지고 있다.

복사전송권센터가 의욕적으로 단속에 나선 지난 2001년 형사고소된 불법복사 사례는 115건이었으나, 2002년엔 36건, 2003년에는 19건으로 그치고 있다. 이것은 복사 문제를 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교수들 자신이 지적재산권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학생들에게 교육시키는 대학 내부의 문화적 혁신이 필요하다. 현재는 소규모 학술출판사들의 몰락만으로 위기가 드러나고 있지만, 거시적으로 지식 유통체계 붕괴로 인해 학술담론의 생산이 심각한 퇴로에 봉착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학계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최철규 기자 hisfuf@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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