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우상화까지는 가지 않았더라도 분명 자기 최면에 빠져 있었을 터이고, 그러다 보니 타자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자신의 왕국 안에서 살아 왔을 것이다. 아마 나의 이러한 자백을 듣고 뜨끔해 할 교수들이 하나 둘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하기야 인류 지성사에서 참회록 혹은 고백록을 쓴 지식인들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그리 자책할 일도 아니라고 위안을 삼을 수도 있으리라. 제아무리 근사한 ‘정신의 준마’를 달리는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이미 내면화된 나쁜 습관을 일종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쉽게 알아내지는 못하리라. 더군다나 지식의 대량 생산을 요구하는 시대에 치이면서 살아가는 요즘의 대학 교수들한테 고도의 자기 성찰을 일상화하는 ‘선비’가 되기를 요구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존재론적으로 과부하를 거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자기반성에 게으른 그러한 습관이 일반인들에게 대학 교수들 특유의 오만과 편견으로 읽혀질 위험이 크다는데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유행되던 먹물이라는 단어가 일반인들의 그러한 인식을 잘 풍자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 교수들이 사회적 희소성을 띠던 시대에는 직업적 특수성 더나가서는 소위 최고 지성인들이 갖추어야 할 고상함으로까지 경원시 되던 것들이 이제는 한낱 잘난체하고 거들먹거리는 것으로 폄하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교수들은 연구실 안과 밖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왕이 되고 자신이 만든 규칙에 모두 따라주던지 적어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적절하지 않은 예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힘든 교수들도 많겠지만, 예를 들어, 대학 사회에서 비일비재한 직원들과의 마찰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경우가 허다하다. 교수들은 그 원인을 대부분 상대방의 행정편의주의, 관료주의, 더 나가서는 무식의 소치로까지 돌린다. 이제 헌법 몇 조에 의거해 노조 총회를 소집한다고 방을 써 붙이는 직원들은 더 이상 그런 교수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그저 밥그릇 싸움의 상대방으로 경계할 뿐이다.
나는 정말 적어도 이데올로기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표현으로는 존재론적으로 (이데올로기를 존재론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나쁜 습관?!), 내 자신을 반성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도 그 친구들 얘기를 듣고 내 자신을 되돌아 볼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좀처럼 그럴 것 같지 않다. 세상에 대한 훈계가 인문학 교수가 할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뼈를 깍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냉철한 자기 성찰과 반성에는 인색한 나의 나쁜 습관 때문이리라. 가끔가다 읽는 파스칼의『팡세』에 나오는 한 구절이 늘 마음에 걸릴 뿐이다. “얼마나 많은 왕국이 우리를 모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