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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들을 추억함 ⑦五日場
사라지는 것들을 추억함 ⑦五日場
  • 김기현 경북대
  • 승인 2004.11.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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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소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십수년 전쯤 장터소리(場打令)를 채록할 요량으로 영남권의 오일장을 찾아 나들이를 꼬박 이태쯤 한 일이 있다. 이전의 민요조사 때도 장터를 찾은 일이 없진 않지만 닷새장만을 골라 다니며 소리꾼을 만나다보니 민요만이 아니라 도시생활에 익숙한 내게 별다른 세상맛과 사람사는 재미를 가져다줬다.


그때부터 얻은 습관으로 일상이 무료하거나 답답할 때, 피로에 지쳐 새로운 삶의 활력을 충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장터를 찾아 나선다. 물을 튕기며 굼틀대는 가물치, 장어, 미꾸라지며, 풋풋한 한 줌의 푸성귀들, 어지러이 널린 옷들, 고래고래 악다구니로 하는 싸움소리, 좌판에 기대 졸고있는 어물전 주인, 물 튕기며 지나는 자전거, 넘쳐나는 막국수 한 그릇. 요즘도 재수 좋게 오일장에 기웃거리면 아내는 질 낮은 물건 산다고 야단이지만 그래도 마트나 백화점에서 물건 사는 것과 비길 바 없이 흥이 나니 이를 어쩌겠나.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엔 ‘사람’이 없다. 가식적인 종업원의 눈웃음과 정찰제 가격표, 눈에만 맞춰 포장한 제품만이 있을 뿐이다. 깎거니 주거니 하며 흥정하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수작소리도 권하고 받는 마음도 없이 그냥 조용하게 움직이며-그것이 세련된 인간의 질 높고 고상한 기품인 것처럼- 짐수레에 담거나 계산대에 들이밀어 계산만 기다리는 물건만이 있다. 그림만 움직이고 소리가 사라진 TV를 보는 것처럼, 움직임만 있는 죽은 세계의 사람들처럼 단지 ‘거래’하고 있을 뿐이다.


소리(民謠)를 공부한답시고 이십 수년을 시골로 돌아다니면서 내가 얻은 건 ‘소리’만이 아니라 ‘사람’을 만난 것이었다. 그래서 민요강의의 첫 시간은 어김없이 “우리의 민요를 만나는 길은 우리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라고 말해왔다.


바로 ‘사람’과 ‘소리’가 있는 곳이 저자거리고 장날이다. 전통사회에서 시장은 단순히 물물을 교환하는 상업거래처만이 아니었다. 어느 곳 할 것 없이 장날이 되면 단조로워 권태롭기 짝이 없던 마을들이 온통 활기와 윤기를 띠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시끄럽다. 저자에 내다 팔거나 교환할 물건들을 준비한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처럼 옷단장하고 삼삼오오 행렬에 끼어든다. 할일이 없더라도 “남이 장에 간다고 하니 빈 지게 지고도 따라 간다.” 


아침나절부터 왁자지껄한 장터는 사람냄새가 나는 곳이다. 못 보던 물건도, 못 만나던 사람들도 만나 그간 일상의 구태의연함에서 깨어난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과 촌구석사람들의 별로 신기할 것 없는 일도 이야기가 된다. 예서 은밀히 혼담이 오가고, 사돈가에 안부를 교환하고, 처녀 총각이 눈도 맞추고,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은 마냥 신기하고 새 세상을 만나는 곳이다. 따라서 시장은 사교장이며 만남의 광장이다. 남의 딱한 사정을 듣고 같이 한숨짓고, 좋은 일에 마냥 기뻐하는 우리네 사랑방이며 삶의 집합소다.


주막거리의 장터국밥이나 국수말이, 찌짐(煎)한 장에 걸쭉한 막걸리 한 사발, 동백기름 반지르르하게 먹이고 박가분 덧바른 주모의 색기있는 웃음, 능청맞은 약장수들의 익살과 타령 한 꼭지, 깡깡이소리로 구성지게 넘어가는 타령조는 서민들의 유일한 오락이자 예술판이다. 파시가 됐지만 닷새 뒤나 다시 만날 시간과 공간의 여백, 아니 그 텅 빈 마음이 자못 두려워 늦게까지 주막거리는 분주하다. 악다구니 쓰는 소리나 노랫소리도 아득해지고, 거나하게 취한 갈지자걸음에 손에든 간고등어 한 손이 산모롱이 넘어야만 그렇게 우리들의 축제판은 서서히 막을 내린다.


이제 이러하던 시골장터는 사라졌다. 현대화와 서구적 세련미와 대자본이 장터를 뒤엎었다. 이제 이 땅 우리의 축제판이 사라진 것이다. 그 활기차던 장터사람들도 죽어 갔다. 장터에서 장날 이루던 우리들의 삶마저 시들해져 가니 세상은 온통 외래의 것이 되어졌다. 인간이 부재하는 백화점과 마트의 공간에서 죽어가는 장터소리와 우리 삶의 온기는 어디에서 다시 찾을 것인가.

“얼씨고 씨고 들어간다 / 절씨구 씨구 들어간다
 아가리 크다 大邱場 / 무서워서 못 팔고
 豊角場도 벌판장 / 궁디가 시러버서 못 팔고
 코 풀었다 興海場 / 더러워서 못 팔고
 설설긴다 杞溪場 / 무릎 아파 못 팔고
 앉아 본다 安康場 / 고개 아파 못 팔고
 잘 달린다 慶州場 / 발 아파서 못 팔고………”

김기현 / 경북대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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