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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장욱진전(갤러리 현대, 11.2-11.21)
미술비평: 장욱진전(갤러리 현대, 11.2-11.21)
  • 정무정 덕성여대
  • 승인 2004.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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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속의 원시인...일상 속에 구현한 이상향

▲나무 ©
문화관광부에서 ‘1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한 故장욱진 화백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장욱진은 한국 근현대회화사를 가로지르며 유화, 판화, 매직그림, 먹그림, 陶畵 등 매우 다양한 매체로 독특한 조형세계를 구축한 화가다. 그는 까치, 소, 개, 해, 달, 산, 나무, 집, 가족 등 우리에게 친근한 일상적 소재를 이용해 인간과 자연이 합일된 이상향을 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그의 카달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e)가 발간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체계적 연구의 기반이 마련됐지만, 동세대 작가였던 이중섭, 김환기 등에 비하면 장욱진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수준이다.

장욱진이 일제의 억압, 해방공간의 혼란, 6?25의 참상 등 한국 근현대사의 정치, 경제적 격변을 겪으면서도 일관되게 토속적인 소재에 집착했다는 건 그에게 그림이 현실도피의 수단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산 피난시절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또 다른 도피수단인 폭주에 빠진 것도 그러한 해석을 부추긴다. 따라서 그의 모습에서 보들레르가 묘사한 낭만주의 예술가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림은 내가 살아가는 의미요, 술은 그 휴식”이라는 그의 말이 시사하듯, 그의 현실도피의 목적은 역설적이게도 현실긍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취한다는 것, 그것은 의식의 마비를 위한 도피가 아니라 모든 것을 근본에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악의 없이 노출되는 인간의 본성을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이기적인 내적 갈등과 감정의 긴장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경에 찬 아름다움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 가로 놓인 우울한 함정에서 절망 대신에 긍정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절실한 정신의 휴식인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의 삶의 의미인 그림 역시 현실로부터의 무책임한 도피가 아니라 ‘긍정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버려야겠다”라고 끊임없이 되뇐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가 즐겨 다룬 토속적인 소재는 그러한 ‘발판’의 재료였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이들 재료가 그의 소박하고 순수한 시각과 마음을 거치며 다채롭게 가공된 결과물이었다.

먼저 집안에서 모기장을 치고 누워있는 인물을 묘사한 ‘모기장’(1959)에서 모기장은 측면, 인물은 윗면에서 포착된 모습이고, 집의 벽은 제거돼어 내부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길을 걷는 가족과 가축을 묘사한 ‘가로수’(1978)에서는 집들이 나무 위에 위치해 공간적 관계가 어지럽게 뒤엉켜 있다. 이같은 다시점, 투시기법 그리고 비논리적 공간관계 등은 아동미술과 원시미술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으로, 아동과 원시인의 소박하고 순수한 시각과 표현방식을 통해 세속과 문명을 초탈한 이상향을 그리려는 장욱진의 의지를 드러낸다.

장욱진은 해방 직후에 박물관에서 일하면서 고분발굴 작업에 참여하고, 박물관 소장품 연구를 통해 원시와 고대의 미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또 “어린이만이 가진 그 깨끗함과 순수무구함, 그리고 원시인에서 볼 수 있는 주정적인 미감”에 동경을 품고 있었다. 치밀한 밀도와 세련된 조형미와 같은 현대적 조형방식 속에 비논리적인 시점, 공간, 스케일이 자연스럽게 결합된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이상향에 대한 그의 관심은 도가의 자연관으로도 나타났다. 그는 “나는 천성적으로 서울이 싫다. 서울로 표상되는 문명이 싫은 것이다”라고 외치며 도시를 떠나 덕소, 수안보, 신갈 등지에서 자연과 벗하며 작업을 했고, 그 자연을 묘사하기 위해 동양의 수묵화에 등장하는 도인과 동자를 집어넣거나 수묵화의 간결한 필치를 구사했다. ‘밤과 노인’(1990), ‘산수’(1981) 등이 그 예에 속한다.

1965년 ‘현대문학’ 8월호에 실린 글에서 그는 자연과 일체가 된 자신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여름의 강가에서 부서진 햇빛의 파편들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수면 위에 떠도는 아지랑이를 타고 동화가 들려올 것 같다. 물장구를 치며 나체로 뛰노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에서 적나라한 자연을 본다. 그리고 천진했던 어린 시절에의 향수가 감미롭고 서글프게 전신을 휘감는 것을 느낀다. 태양과 강과 태고의 열기를 뿜는 자갈밭, 대기를 스치는 여름 강바람- 이런 것들이 나 역시 손색없는 자연의 아들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이럴 때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공허하지 않다. 자연의 침묵이 풍요한 내적 대화를 가능케 한다.”

한편 집안에 불교신자가 많았고 非空이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던 장욱진은 불교적 주제를 통해서도 세속의 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한 욕망을 표현했다. 불교의 가르침 석가의 생애를 그린 ‘팔상도’(1976)나 아내의 모습을 불상의 모습으로 그린 ‘진진묘’(1970)와 같은 작품이 그 예다.

일관된 작품세계를 통해 장욱진은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의 길을 지켜나간 미술가상을 보여주고, 서양화와 동양화, 현대미술과 원시, 아동미술, 특수성과 보편성이 공존하는 모습을 통해 그가 추구한 소박한 이상향을 제시했다. 최근 병역비리 탤런트의 입영연기 탄원에서 보듯이 경제적 이익을 지고의 문화적 가치로 간주하는 문화산업의 논리 앞에 입법기관조차 유린당하는 이 시대에 장욱진의 소박하고 순수한 삶과 예술은 우리가 지키고 계승해야할 문화적, 예술적 가치의 원형을 제시해준다고 하겠다.

정무정 / 덕성여대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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