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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왜 고종을 재주목해야 하는가
특별기고 : 왜 고종을 재주목해야 하는가
  • 강상규 서울대
  • 승인 2004.11.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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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조선 정치전통의 '비판적 상속자'...조선 후기와 단절된 논쟁 비생산적

강상규 / 서울대·외교사

고종과 대한제국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다. ‘서구의 충격이 동아시아를 뒤흔드는 와중에 생부인 대원군과 왕비 사이에서 끊임없이 우왕좌왕하다 왕비가 일본의 낭인에 의해 시해된 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주하는가 하면, 국가존망의 위기상황에서 돌연 제국을 선포하고 시대착오적으로 황제가 되어 독립협회를 탄압하였으며 절대군주를 기도하다 결국 망국의 군주가 된 인물.’  고종은 이처럼 우유부단한 암군으로서, ‘근대’와 명확히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전통’, 곧 중세 봉건 조선왕조의 암울하고 부정적 측면을 전형적으로 표상하는 인물로 알려져 왔다.

따라서 고종은 한반도 역사의 가장 극적인 전환기를 살면서 40여년이 넘게 국정의 최고책임자의 자리에 있었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학문적 논의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  더욱이 한반도에서 근대사학의 출발 자체가 왕조사관을 극복하는 과제에서 시작되었던 점 등을 고려해볼 때, 이태진 교수의 고종이나 대한제국에 관한 해석이 근본적으로 논쟁적인 성격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작업의 치밀성 여부와 관계없이,  이교수의 논의가 이러한 연장선상에 놓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논쟁을 보면서 정치외교사를 전공하는 필자가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고종에 관한 논의가 고종이라는 군주 개인에 대한 평가 문제로 성급하게 귀결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고종에 관한 논의가 안개에 둘러싸인 고종 개인에 관한 탐구에서 시작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단순히 주목할 만한 한 개인이거나 공인(公人)에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왕권이라는 공간은 조선 왕조의 상징적인 질서의 축으로서 정치권력의 정통성의 근거가 되고 있었다.  따라서 국왕의 상징권력과 실질권력이라는 측면이 어떻게 현실정치에서 기능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국왕을 둘러싼 복합적인 정치적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하는 해명은 전환기 조선 정치를 보다 생동감 있고 깊이 있게 이해하는 불가결한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종을 둘러싼 논의는 급변하는 대외 상황에 조선 정부 차원에서 어떠한  정치적 제도적인 모색이 진행되었는지를 살피고, 정부 내의 권력을 둘러싼 긴장관계와 정책주도의 근원을 보다 심도 있게 논의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이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고종에 관한 논의가 필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이 점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측면의 연장선상에서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 될 사실은 고종이 어떤 식으로든 조선의 정치전통의 상속자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전환기 군주에 관한 논의는 이영훈 교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전통과 근대가 ‘不相容’의 대립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복합적인 상관관계 속에서 반응하는 하나의 생동감 있는 사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국제관계라는 관점에서도 전환기 군주 고종에 관한 논의가 심도 있게 진행된다면 조선에서 중화사상의 성격에 변용이 이루어지고 국가평등 관념이 형성되어가는 측면과 함께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상이 던지는 현재적 과제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음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논쟁과 관련하여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대한제국에 관한 논의가 고종시기에 관한 정치사적 맥락과 단절된 채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대한국국제를 선포하면서 군주를 중심으로 실질권력의 강화를 모색하게 되는 것이나 독립협회와의 협력관계를 지속해가지 못하게 되는 내용을 기존의 고종에 관한 이미지하에서 분절적으로 논의하게 되면 대한제국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대한제국을 본다고 해서 대한제국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일기로 1623년부터 1910년까지 288년간의 역대 국왕들의 하루 일과, 지시, 명령, 각 부처의 보고, 각종 국정회의 및 상소 등을 모두 전제한 연대기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이 국왕 사후 사관들에 의해 편집된 2차 자료라면,「승정원 일기」는 당시의 정치·경제·국방·사회·문화 등에 대한 생생한 역사를 그대로 기록한 1차 사료이다. 288년간 매일의 날씨 정보를 기록 수록한 천문 기상학 자료이외에 국문학의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등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
그러면 조선의 역사적 구조적 맥락과의 관계 속에서 고종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하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고종을 둘러싼 엇갈리는 묘사는 방대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당대의 개인문서에 묘사된 고종에 관련된 논의들을 자의적으로 조합해서 고종에 관한 이미지를 만들어서는 곤란할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문서는 기록자의 신분과 전문성 그리고 그 인물이 처해있는 정치적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읽어야한다.  반면 승정원일기를 보면, 고종이 경연을 통해 어떠한 학습과정을 겪었으며, 그가 어떠한 정치적 사유를 갖고 있는지를 추출해낼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경연은 조선의 사상과 문화의 축적된 역량이 교육이라는 형식을 빌려 정치와 소통될 수 있도록 국가 정상의 레벨에서 제도화되어 정착된 것이다.  고종은 즉위이후 10여 년간 행해진 1300여회에 걸친 경연에 임하면서 당시 조선의 기강이 매우 쇠약할 뿐 아니라 정치권력이 사적으로 남용되고 있다는 사실과 아울러 국가의 근본인 백성(民)의 생활이 극히 불안한 상황에 놓여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위민(爲民)=민본 정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는 것이 군주인 자신에게 부여된 정치적 책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이 머물던 내실. 낡아보이는 이 우아한 공간에서 셋방을 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
한편 승정원일기, 일성록에 나타난 즉위초기 고종은 서양세계를 전통적인 화이관념에 근거하여 문명세계와는 상극적인 이미지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은 환언하면 고종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서양세계에 대한 이미지가 ‘예의의 나라로서의 조선’이라는 인식을 정합적으로 만들어가는 소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속하고 또한 지켜야만 될 문명세계의 역상(逆像)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동아시아 질서의 전환을 경험하고 점차 정치적으로 성숙해져가는 과정에서 청에 파견된 사절의 보고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대외정세를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소화해나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중국에 파견된 사절의 보고는 전통적으로 대외정세에 관한 국왕의 실질적인 정보루트가 되고 있었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고종은 여러 차례의 보고를 거치면서 다양하고 적극적인 질문을 통해 서양제국과 서양화한 일본이 세력을 확산시켜가고 있음을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또한 중국이 조선으로서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이미 현실적으로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고종은 조선의 배외정책이 시대적인 대세를 무시한 것으로서 현실적으로 조선이 점점 고립되고 있다는 위기의식과 불만을 동시에 갖게 되었고 이같은 상황판단은 대외정책의 새로운 방향전환과 친정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 고종의 정치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누구였을까.  관련된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박규수임을 알 수 있다.  기존의 논의들은 박규수와 개화세력간의 관계 혹은 박규수의 사상 자체에 주로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고종과 박규수간의 관계에 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고종즉위 이후 고종10년에 이르기까지 박규수는 평안감사시절과 제2차 연행기간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간 동안 고종의 경연관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논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태진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고종에 관한 논의는 이제 시작이다.  이교수의 연구가 고종을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다소 무리한 해석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논의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과정에 대한 진지한 이해가 없는 역사의 교훈이란 도그마로 전락하기 쉽다.  결론만이 난무하고 결과만이 소중하게 논의되는 곳에서 의미있는 가치와 창조적 상상력이 피어나기 어렵다.  우리의 전통을 철저히 근대와 단절시켜 해석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진지하고 치열하게 살아왔던 선조들의 의미있는 가치와 신념, 그리고 모색들을 근대에 미달된 미숙한 것으로 낙인찍어버리기 쉽다.  21세기의 학문이 자기소외의 학문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도 이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천착위에서 전통과 근대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고 지적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필자는 동경대에서 ‘조선의 유교적 정치지형과 문명사적 전환기의 위기: 전형기 군주 고종을 중심으로’라는 박사논문을 제출했다.  논문으로는, ‘고종의 외교정책과 대외인식’, ‘조선시대 왕권의 공간과 유교적 정치지형의 탄생’, ‘근대일본의 만국공법 수용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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