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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4] “예수는 모든 조직의 적이었던 순교자, 니체는 이기주의자”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4] “예수는 모든 조직의 적이었던 순교자, 니체는 이기주의자”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5.17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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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라이너

삼일절이나 광복절이 오면 곧잘 일제 잔재를 이야기하지만, 일본식 용어 몇 마디를 따지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더 중요한 잔재는 사상이다. 그 중 하나가 전체주의 내지 집단주의로 이는 남북한 모두에게 공유된 일제의 잔재다. 그것이 조선시대를 지배한 유교를 배경으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근대적인 의미의 전체주의는 일제 이후에 뿌리박은 것이었다. 특히 일제 말의 ‘귀축 미영의 사상’으로 개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가 철저히 배척되었다. 해방 후에도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프티부르주아 사상으로 매도되었다. 북한에서는 지금까지 그렇지만 남한에서도 사회주의자나 민족주의자 내지 국가주의자들에 의해 그런 경향이 남아 있다. 특히 헌법에도 규정되고 정치적으로도 애용되는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와 달리 개인주의는 여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개인주의자’ 소크라테스와 예수를 돌아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나 예수가 개인주의자라고 하면 어떨까? 개인주의를 “어떤 도그마, 전통, 외부의 결정에도 의존하지 않고 개인의 양심에만 호소하는 도덕적 교리”라고 정의한 한 라이너(Han Ryner, 1861~1938)가 예로 든 대표적 개인주의자가 바로 소크라테스와 예수인데 그 두 사람이 그렇게 정의된 개인주의의 전형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그 두 사람을 좋아하지만 조국인 아테네의 민주주의보다 적국인 스파르타의 전체주의를 좋아한 소크라테스보다는 열두 명의 사도들과 함께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어 방랑을 하다가 처형 당한 예수를 좋아한다. 반면 라이너는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 외부의 진리를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자신 안에서 진리를 찾도록 가르쳤고 그 결과 도시가 숭배하는 신을 존중하지 않고 청소년을 부패시켰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는데,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의견을 고백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결국 그는 법과 판사들에 의해 비난 받고 개인주의의 순교자인 도시에 의해 암살당해 죽었다.“고 보았다.

 

한 라이너.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한 라이너.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라이너에 의하면 예수는 “자유롭게 살고 방랑자였으며 어떤 사회적 관계와도 무관했다. 그는 사제, 외부 컬트 및 일반적으로 모든 조직의 적”이었고 “사제들에 의해 쫓기고 사법 권력에 의해 버림받은 예수는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소크라테스와 함께 그는 종교의 가장 유명한 희생자이며 개인주의에 대한 가장 유명한 순교자”다. 그런 예수를 좋아하는 나는 예수처럼 살고 싶어서 그를 숭배하지 않는다. 예수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숭배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처럼 살려고 하지 않고 예수를 무조건 숭배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니체가 정치했다면 지배자 아니라 복종자 됐을 것”

 

라이너는 에피쿠로스와 에픽테투스도 개인주의자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절제를 존중하며 “다른 모든 필요, 즉 거의 모든 욕망과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 자연적이고 필요한 욕망, 둘째 자연적이지만 필요하지 않은 욕망, 셋째 자연적이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는 욕망이다. 그 중 첫째는 행복의 절대조건으로서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일단 충족되면 더 이상 요구되지는 않는 것으로 모든 동물에게 공통된다. 반면 둘째와 셋째 욕망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인데, 특히 셋째는 우리의 적으로서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둘째도 무리 없이 충족되는 경우에만 추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에게는 행복도, 자유도 있을 수 없다. 또 라이너는 “스토아학파인 에픽테투스는 용감하게 가난과 자신의 노예 신분을 지켰다. 그는 평범한 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완벽하게 행복했다”고 했다.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

 

라이너는 그 밖에도 안티스테네스와 디오게네스, 제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을 개인주의자로 보지만 그들에 대한 평가는 앞에서 본 네 사람과는 달리 인색하다. 가령 안티스테네스와 디오게네스의 가르침은 스토아주의의 스케치에 불과하고,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이며, 데카르트는 지적 개인주의자이고, 스피노자는 독선적이라고 비판한다. 라이너가 스피노자에 대해 내린 “그는 몇 알갱이와 약간의 우유 수프를 먹고 겸손하게 살았다. 그에게 제공된 의자를 거부하면서 그는 항상 육체노동을 통해 일용할 양식을 얻었다. 그의 도덕적 교리는 금욕적인 신비주의다. 그러나 너무나 지적이어서 그는 이상한 절대주의적 정치를 고백했고, 권력에 직면하여 생각의 자유만을 유보했다. 어쨌든 그의 이름은 위대한 도덕적 아름다움보다 형이상학적 힘을 더 많이 염두에 두고 있다”는 평가는 옳다. 또 데카르트에 대해 “지적인 개인주의자지 도덕적인 개인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의 실제 도덕성은 스토아학파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공식화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주의와 반대로 법과 관습에 순종할 것을 권고하는 ‘잠정적 도덕성’만을 알려주었다. 더욱이 그는 다른 상황에서 철학적 용기가 부족한 것 같다”고 한 것도 옳다. 그러나 나는 앞선 글에서 보았듯이 적어도 디오게네스와 제논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 라이너가 비겁한 에고이스트라고 비판한 몽테뉴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다.

라이너는 개인이 의지 할 수 있는 힘으로서 주관적 의지를 강조했지만, 그가 정의한 이러한 개인주의자들로부터 그는 스탕달과 니체와 같이 “자신을 개인주의자라고 선언한 정복적이고 공격적인 이기주의자”를 구별했다. 라이너에 의하면 힘으로 행하고자 하는 니체의 개인주의는 그가 말한 초인에게만 적용되는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모든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초인주의를 주장한 니체를 개인주의자라고 부를 수 없다고 했다. 노예적인 존재를 필요로 하는 자는 허위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즉 노예의 주인은 노예를 두렵게 하거나 마음에도 없이 사랑하거나 속임수 등의 무리한 수단으로 억누르는 것 외에는 주인공이 될 수 없어서 그 결과 자신이 노예의 노예가 되므로 개인주의와는 가장 먼 존재가 된다. 니체는 한 번도 정치를 한 적이 없지만 만일 그가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고자 했다면 “훌륭한 지배자가 아니라 가장 불쌍한 복종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라이너는 보았다. 니체에 호의적인 자들은 흔히 니체를 프러시아 군사 국가를 싫어했다고 하면서 그가 나치스에게 악용 당했다고 주장하지만 라이너는 니체의 초인주의를 노예주의로 비판한 것이었다.

 

한 라이너, 제국주의 근대의 양심

 

한 라이너는 프랑스의 개인주의 아나키즘의 철학자이자 활동가이자 소설가였던 바크 엥르 앙리 암브로와즈 네르(Jacques Élie Henri Ambroise Ner)의 가명이다. 전자의 이름이 더 유명하므로 그것을 사용하도록 한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오랑의 시골에 살았던 겸손한 종교적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가 죽은 후 가톨릭을 포기하고 사회사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94~1895년에 두 편의 소설을 출간한 뒤에 언론인과 교사를 지냈지만 어려움을 겪고 작가가 되었고 1896년부터 한 라이너라는 가명으로 여러 개인주의 아나키스트 잡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중 대표적인 글이 위에서 소개한 내용을 담은 1903년의 「개인주의 미니매뉴얼(Petit manuel personaliste)」이었다.

사회를 “공동 노동을 위한 개인들의 모임”으로 정의한 라이너는 사회의 악에서 무관심을 키우는 것에 대한 개인의 저항을 발전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는 행복을 자신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사회는 자연적 노동의 위대한 도구인 지구를 소수에게 넘기기 위해 모든 사람으로부터 훔쳤다"고 생각하고 군중을 ”가장 잔인한 자연의 힘“으로 보고 거부했다. 그는 노동을 사회에 의해 악화되는 악으로 ​​보았다. “첫째, 그것은 모든 노동에서 특정한 수의 사람들을 임의로 떼어내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준다. 둘째, 그것은 쓸데없는 노동과 사회적 기능에 많은 사람을 고용한다. 셋째, 그것은 모든 사람 사이에서, 특히 부유하고 상상의 필요 사이에서 배가되고,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끔찍한 노동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과한다.”

 

바르톨로메오 반제티(왼쪽)와 니콜라 사코. 이탈리아계 미국인 무정부주의자들로 1920년 무장강도 및 살인 혐의로 체포돼 이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증거, 증언 등이 어긋났음에도 석연치 않은 재판이 이어졌고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제적인 사면 운동이 일었으나 둘은 끝내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진=위키피디아
바르톨로메오 반제티(왼쪽)와 니콜라 사코. 이탈리아계 미국인 무정부주의자들로 1920년 무장강도 및 살인 혐의로 체포돼 이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증거, 증언 등이 어긋났음에도 석연치 않은 재판이 이어졌고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제적인 사면 운동이 일었으나 둘은 끝내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진=위키피디아

 

독일의 개인주의 아나키스트인 슈티르너에 따라 그는 “특정 국가들에서는 왕이나 황제, 다른 나라에서는 인민의 의지라고 불리는 사기, 질서, 정당, 종교, 조국, 인종, 피부색과 같은 외부의 ‘우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희생”을 거부했다. 피부색은 인종을 의미했으며 “백인은 특히 프랑스, ​​독일, 러시아 및 이탈리아인을 하나의 컬트로 통합하고, 이 고귀한 사제들은 수많은 중국인들을 피의 제물로 삼았다.  아프리카 전체를 지옥으로 만들고,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파괴하고 흑인들을 린치한 것도 그들이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복이 번성한 시대에 거의 유일한 양심적 발언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다가오자 평화주의 와 반전을 주장하며 이탈리아계 미국인 아나키스트인 사코(Nicola Sacco, 1891~1927)와 반제티(Bartolomeo Vanzetti, 1888~1927),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 마흐노(Nestor Makhno, 1888~1934) 등을 위해 활동을 한 점에서도 그는 당대 유럽 지식인 중에서 보기 드문 양심이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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