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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國이념은 ‘레토릭’, 개명군주는 ‘인정’…고종 노력, 왕권유지로만 몰아선 안돼
民國이념은 ‘레토릭’, 개명군주는 ‘인정’…고종 노력, 왕권유지로만 몰아선 안돼
  • 주진오 상명대
  • 승인 2004.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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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에 개입하며 : 대한제국의 의미와 한계 총체적으로 보자

주진오 / 상명대·한국사

곧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대한제국 논쟁’이 언론의 조명을 받으면서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 논쟁이 이태진 교수가 스스로 내발론자를 자처하지 않음에도 마치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한국사학계와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한 경제사학계 간의 논쟁으로 비춰지고 있다는 점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역사학계에서 이 교수의 학문적 열정과 문제제기는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내발론을 수용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의 경우에 더욱더 동의하지 않고 있다.

이는 대한제국 1백주년을 기념해 ‘역사비평’ 1997년 여름호에 실린 좌담과 한국역사연구회에서 주최했던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 학술토론회 (‘역사와 현실’ 제26호, 1997.1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교수신문에서 이 논쟁의 성격을 이태진 교수의 업적이 “내발론을 대한제국으로 옮겨 와서 이어가려는 시도”로 파악하면서, 그의 주장이 “내발론자들을 중심으로 환대를 받았다”라고 한 것과 “대한제국이 자생적 근대화론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라고 한 것은 오해라고 할 수 있다. 이 논쟁은 이태진 교수와 식민지근대화론자 간의 논쟁일 뿐이다.

이 교수가 고종이 정조를 계승해 민국이념으로 통치했다는 주장은 인정하기 어렵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왕권유지를 위한 레토릭일 뿐이며 그 자체를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군주의 이념적 기반으로 내세우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이 수행했던 개혁사업의 결과가 민에 대한 수탈강화로 나타났다는 점도 분명히 지적돼야 한다. 한편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과대평가하고 반대로 개화파의 노력에 대해서는 친일이라고 규정해 버리는 논리에 대해서 일본을 모델로 근대개혁을 추진하려는 세력을 훗날 국권침탈과정에서 일본에 협력한 세력과 동일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고종의 역할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오히려 당시의 민족문제를 고종과 일본의 대립으로만 축소시킬 우려가 있다. 한편 내장원 재정운영에 대해서 황실이 근대개혁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불가피성은 어느 정도 인정되나 분명히 재정구조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이 교수의 논리가 당시의 시대적 조건에 비춰 고종과 대한제국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에 치우쳐 있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 역시 지나치게 의미를 부정하는 데 일관하고 있다. 양자 모두 부조적 수법이며 특수성론에 빠져 있는 것이다.

김재호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근대경제성장이 식민지기에 개시됐다고 주장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대한제국 식민지화의 필연성과 식민지 기간동안 일본의 시혜를 강조하는 논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는 내발론이 바라마지 않는 굴절 없이 탄탄대로를 거쳐 근대경제성장을 시작했던 나라가 몇이나 되는지 궁금하다고 한다. 가보지 않은 길과 비교하기보다 식민지 시대에 진행된 근대경제성장의 실상을 파악하고 지금의 한국사회와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는 일이 더 가치 있고 흥미롭다고 한다. 오히려 김 교수에게 되묻고 싶다. 과연 세계사적으로 순조롭게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고 제국주의로 전화했던 나라가 얼마나 되는가. 당시 대한제국이 경제성장에서 뒤처지고 근대국가 체제를 완성시키지 못했다고 해서 반드시 식민지로 전락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나아가서 식민지 기간동안 근대적 경제성장을 이룩한 부문이 많다 해도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으며 식민지 지배를 통한 인적, 물적 수탈을 통해 식민지 이전 시기에 성장하고 있던 부분이 피해를 입은 부분은 없는가.

뒤늦게 논쟁에 합류한 이영훈 교수는 고종의 민국이념을 성리학적 군주로 평가하면서 성리학과 개명군주는 서로 합치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다산이 고대했던 개명군주의 출현이 무산된 것을 아쉬워한다. 그는 19세기 이래 조선 사회 내부에서 외부와의 영향과 관계 속에서 성장해 온 근대 개혁론의 실체를 전적으로 부인한다. 문호개방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경제가 급속히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당시 지식인들의 논리는 동도서기론과 거기서 발전한 변법개화론 및 문명개화론이 각축하는 과정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고종도 이들 논리 사이에서 그때그때 자신의 입장을 바꿔 가면서 현실에 대응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1873년 20세에 親政에 나서서 30여년을 다스렸던 군주가 아무런 사상적 발전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1876년부터 이루어진 문호개방의 과정에서 고종은 대체로 개방론의 입장에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김홍집이 들여온 ‘조선책략’과 ‘이언’을 유생들의 ‘淺識을 開導’한다는 명목으로 인쇄해 반포하도록 한 것이 고종이었다. 1882년 일본에서 조선의 정부 내에서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한 자들이 고종과 김옥균, 박영효 정도 밖에 없다고 파악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볼 것인가. 아관파천 이후에도 척사론자들의 요구에도 단발령의 취소를 거부했고 대한제국 수립 후에는 대신들의 단발을 강요하기까지 했던, 그리고 과거제의 부활과 연좌제의 재도입을 주장하는 보수세력의 요구에 끝까지 응하지 않았던 고종이 성리학적 도학군주를 지향했다고 하는 것은 고종의 의미를 철저하게 부정해 식민지화의 필연성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비록 실패했고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고종이 개명군주를 지향했다는 점은 인정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물론 고종의 한계와 대한제국의 개혁사업에 나타나는 문제점들은 많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반드시 고종 자신에게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간 당시 개화파 관료들의 문제도 함께 지적돼야 한다. 김 교수는 “개화기 선각자들의 고투를 단지 외세에 부화해 권력을 장악하고자하는 권력투쟁으로 폄하하고 있다”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같이 개화파에 대해서는 각별한 애정과 이해를 보여주는 김 교수라면 당연히 고종과 대한제국의 개혁사업에 대해서도 왕권유지만을 위한 것으로 몰아붙이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조선왕조는 봉건적 분권 경험을 지닌 서양이나 일본과 달리 19세기 초까지 4백여 년 동안 전제적 중앙집권적 국왕을 중심으로 정치가 이뤄졌다. 따라서 왕권을 폐기한 위에서 국민국가를 구성하려고 하는 시도가 불가능할 만큼 국왕 중심의 정치가 강고한 규정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근대사 연구에서 국왕의 향배를 제외해서는 곤란하다.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주도하려고 하는 왕권은 많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국민의 역량이 성숙됨에 따라서 언젠가 타도되거나 무력화돼 입헌군주제나 공화정으로 이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 외세가 개입해 일부 관료와 결탁해 왕권에 대한 위협과 제약을 가하게 되는 경우 국민들은 민족적 입장에서 반발을 보이게 된다. 일부 개화파 관료들에 의해 진행됐던 1884년 정변과 1894년 개혁, 나아가 독립협회 운동이 선진적 정치의식과 전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언론과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보다 외세와 결탁해 권력을 장악하고 왕권을 무력화한 가운데 근대개혁을 주도하겠다는 그들의 방식이 좌절하면서 ‘開化亡國論’이 널리 퍼지게 됨에 따라 국민들 사이에서 근대개혁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경향을 초래한 것도 그들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고종을 보필해 근대개혁을 주도해 나가야 했던 유능한 개화관료들이 살해되고 망명해 인적자원을 고갈시키고 만 것도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따라서 고종이 외척과 근시세력들을 통해 정치를 한 것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당연하고 특히 대한제국 시기에 도대체 개혁주도세력, 이데올로그가 누군지를 알 수 없을 정도이며 황제가 정부 관료를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 국정의 난맥상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당시 정부 관료들이나 망명자들의 행태를 보면 고종이 그런 방식으로 운영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부분도 있다. 따라서 고종에게 근대 국민국가 수립의 실패책임을 묻는 것은 가능하나 전적으로 그에게만 몰아가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런데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자신들이 근대화 지상주의로 지칭되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정을 표하면서 오히려 내재적 발전론이 근대화 지상주의라고 몰아세운다. 한국사학계에서는 근대화라는 것이 당시의 시대적 조건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으로 이해해 왔고 그것이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근대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인정한 가운데 그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과 혼란까지도 하나의 과정으로 인정하려는 것이다.

반면에 그들을 근대화 지상주의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산업화를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지표로 내세우면서 근대화만 이룩됐다면 그 권력의 주체가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논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식민지화에 기여했고 식민지배에 협력했던 친일세력은 역사의 흐름에 순응했고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세력이 되고 만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논쟁이 생산적인 토론으로 전개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태진 교수와 일부 경제사학자들 간의 공방전으로 진행되지 않아야 한다. 사실 이 논쟁에 역사학계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를 주저했던 것은 바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그동안 방대하고 치밀한 실증작업을 통해 이룩한 성과를 반박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이유도 있지만 서로 간의 역사인식의 거리가 너무 멀고 논쟁을 통해 상호소통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진행돼 온 논쟁을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전환해 가기 위해서는 관련 연구자들이 한국근대사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내용을 가지고, 역사학과 경제사 영역만이 아니라 다양한 학문분야의 참여를 통하여 이뤄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신문이라는 매체의 한계를 뛰어 넘어 대한제국을 총체적으로 연구하고 토론할 수 있는 본격적인 장이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필자는 연세대에서 ‘19세기 후반 개화 개혁론의 구조와 전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근대 국민국가 수립과정에서 왕권의 역할(1880∼1894)’ 등의 논문이, ‘한중일 역사인식과 일본교과서’, ‘한국근현대의 민족문제와 신국가건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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