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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진단_학술출판의 발전을 모색한다: ① 위기의 징후
기획진단_학술출판의 발전을 모색한다: ① 위기의 징후
  • 최철규 기자
  • 승인 2004.11.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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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간 매출 하락, 인력감축 돌입

경기불황의 터널은 끝이 없고 학술출판사들의 등골도 갈수록 깊게 휘어진다. 오늘날 학술출판은 초라하고 위태롭게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교수신문은 앞으로 몇차례에 걸쳐 학술출판이 겪고 있는 위기상황과 그 구조적 문제와 잠재적 위기요인들, 그리고 학술출판이 안정적으로 수준 높은 생산 유통 시스템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는 무엇인지 근본적인 진단을 해나가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요즘 학술서적의 경우 3천부만 나가도 ‘대박 터뜨렸다’는 주위의 시샘을 받는다. 대부분의 학술출판사가 초판을 1천부 이내로 축소했으며 이마저도 다 팔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초판이 전량 판매되기까지는 약 2~5년이 걸린다. 이는 전공분야별로 편차가 있는데, 사회복지나 역사, 의학, 기술 관련 서적은 2~3년 내에 초판을 소진하지만, 인문사회의 경우 최소 5년은 기다려야 끝을 본다. 그 기간동안 새로운 서적을 꾸준히 출간해야 출판사가 유지되는데, 재투자비를 확보하지 못해 그 사이에 주저앉는 경우가 많다. 출판사의 연명을 돕는 것은 오직 ‘빚’이다.

구조조정 회오리에 휩싸인 학술출판시장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사인 이후의 최근 변화는 불황에 직면한 학술출판사들의 움직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이후의 이일규 사장은 “작년도 2/4분기부터 매출이 이전의 절반 수준으로 하락해 회복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라고 말한다. 재정 압박 때문에 기본적인 출판 기획을 전면 수정했다. 2000년에 계약을 맺고 번역 작업도 거의 끝낸 지젝의 번역서 출간을 최근 포기하고 도서출판 b에 양도했다. 총 50권을 목표로 발간하기 시작한 문고판  ‘B2B21’가 난항에 부딪힌 것도 타격이 컸다. 최소한 3천권은 나가야 수지를 맞출 수 있지만, 권당 1천부씩 나간 것이 전부다. 연말에 2차분 5권이 나간 후 이후의 계획은 무기한 연기상태다.

결국 이후는 효율적인 경영을 모색하고자 올 7월에 시울과 이후로 경영을 분리하여, 시울은 인문예술전문 출판사로, 이후는 사회과학과 생태 전문 출판사로 새 출발했지만 전망은 여전히 안개속을 헤매고 있다.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사 들녘은 근래에 사무실을 이전하면서 자진사퇴 2명을 포함해 총 5명의 인원이 감축됐다. 이제는 전문학술서는 아예 포기하고 대중적 교양서와 실용서 위주로 간다. 서양 철학 전문 출판사인 서광사나 당대, 개마고원 등 고급 교양서와 더불어 학술서적을 간행한 출판사들도 구조조정에 돌입하고 있다.
과학과 경영 분야 교재를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도서출판 아진의 대표 김근배 씨는 “IMF 때도 이정도 불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2001년부터 시작된 하향화 추세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교재의 경우, 보통 대학 구내서점 주문이 전체 물량의 50%를 차지하는데, 초기에는 주문의 25%만을 내보낸다. 시장성 조사를 위해서다. 요즘엔 그 25%도 채 나가지 않고 반품된다고 한다.

교재판매 부진은 아진의 또 다른 주력 사업인 번역서 출간 작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번역서의 경우 로열티 10%, 인세 10%, 서점 마진 15% 정도가 기본적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제작비 감축을 감행하다보니, 결국 책의 질이 떨어지고 독자의 눈길을 끌지 못해 판매부진의 악순환이 될 뿐이다.

‘개강 대목’이 사라진 교재시장

대학출판부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울대출판부의 경우 전년대비 15~20%정도의 매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1년에 약 80여종을 출판하고 있는데, 그나마 많은 종을 생산하다보니 1년에 한 두 권씩만 팔려도 전체적으로는 모양새가 유지되는 형편이다.

서울대출판부는 최근 일반 대중을 타겟으로 하는 ‘교양도서’를 기획하고 있다. 연말에 교수 저자들이 문화, 역사, 스포츠 등 대중적 접근이 용이한 4종의 책을 낼 예정이다. 권영자 기획부장은 “경제적 여건이 나아지지 않는 한 앞으로 대중성을 가미한 출판이 강화될 것”이라고 한다.

대학내 구내서점의 매출 현황도 불황의 여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국민대 구내서점의 경우, 교재판매는 전년대비 약 20% 가량이 하락했다. 무엇보다도 교재 종수가 줄어든 것이 눈에 띈다. 법학의 경우 강의가 많은데도 수업 교재로 선정된 도서는 6종에 그쳤다.

상대적으로 학술출판 시장이 좁은 지방의 경우, 상황은 더 안 좋아 보인다. 경상대 구내서점은 전년대비 30~40% 가량의 감소세다. 서점 관계자는 “요즘이 가장 힘든 때”라고 잘라 말한다. 교재시장의 경우 학기 초 ‘개강 대목’도 이젠 옛말이 됐다. 많은 학생들이 교재를 구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토익 등의 실용 어학교재 판매량이 교재 판매량을 넘어서 꾸준히 증가한다. 교내 어학 서점이라 하는 편이 나을까.

정부지원에 목매는 출판사들

위축된 소비시장을 뚫기 위해 일부 출판사나 출판 도매업체들이 무분별하게 행하는 ‘변칙유통’은 출판계를 총체적 위기로 연결하는 도화선이 되고 있다. 특히, 화려한 이벤트와 물량을 앞세운 할인 경쟁에 박차를 가하는 대형출판사들의 서점 점유에 의해 학술출판시장도 점차로 ‘부익부 빈익빈’이 가속화되가고 있다. 역사비평사의 정순구 부장은 ‘10 대 90의 사회’가 요즘 유통의 현주소라고 지적한다.

일단 책을 납품하고 보자는 심산에서 책의 정가와 납품 가격의 비율을 의미하는 입고율을 경쟁적으로 낮게 책정하는 ‘제 살 깎아 먹기식’ 시장 접근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학술도서의 대부분을 수용하는 도서관에까지 출혈적인 할인 경쟁이 전개되고 있다. 정순구 부장은 “공개입찰에 의해 장서 구입이 이뤄지다보니 중간 납품업자들이 도서의 목록과 질이 아닌 ‘입찰가’로 경쟁에 나서는 바람에, 도서관 입고율이 80% 밑으로까지 내려가고 있다”라고 우려한다.

정부는 학술출판을 장려하는 차원에서 대한민국학술원과 문화관광부를 통해 학술도서 선정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선정 도서를 1천 만 원 가량 구입하는 이 제도들은 그나마 소규모 학술출판사들의 숨통을 트게 하는 단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2004년 학술원 선정에 1권이 선정된 이제이북스의 전응주 대표 이사는 “약간의 빚을 청산하고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줄 수 있어 나름대로 위안이 된다”라고 한다.

그러나 선정 과정의 불투명성, 소규모 예산 편성 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학술도서 선정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관심’은 한 두 권의 학술도서 선정에 일희일비하는 우리 사회 학술출판사들의 비극적인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좀더 체계적인 학술출판 활성화 방안이 모색돼야 한다.

최철규 기자 hisfuf@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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