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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_'쥐식인'을 탈피하자
학이사_'쥐식인'을 탈피하자
  • 박종성 충남대
  • 승인 2004.11.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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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학생들의 원서 해독 능력이 신통치 않다. 이들에게 외국문학은 여전히 ‘낯선 신화’로 여겨진다. 우스개 소리로,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에 진학하여, 영어 원서를 읽고, 영어로 수업을 받으며 영영 헤맨다.” 그래서 대다수 외국문학 전공 교수들은 학생들이 외국어를 습득하고, 해당 언어권의 문화를 이해하고, 문학을 감상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길잡이 역할을 하고자 한다.

많은 학생들이 실용영어를 배우려고 아우성이다. 그런데 영문과 교수들은 풍요 속에서 빈곤을 경험한다. 학생들은 벽돌처럼 두툼한 소설책을 읽어야 하는 강의를 외면한다. 그 대신 토플과 토익 고득점 획득 및 의사소통 능력 향상 위주의 영어학습에 치중한다. 이런 경향은 곧바로 교양과 전공 교육의 부실화로 이어진다. 당연히 비판능력과 사유능력이 약화된다. 영어를 배우는 목적이 ‘출세하기 위해서’이다. 1887년 한국 최초의 외국어 교육기관인 동문학이 설립되었을 때, 원어민들이 한국 학생들에게서 들었었던 대답과 똑같다. 학생들이 영어를 일종의 종교로 숭배하고, 교수들은 영어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는 클리닉을 운영하는 꼴이다.

이런 위기의식에서 이번에 한국 근대영미소설학회는 57명의 영미소설 전공자들이 대거 참여하는 ‘영국소설 명장면 모음집’과 ‘미국소설 명장면 모음집’이란 기획물을 내놓았다. 필자가 이 작업을 기획하고 총괄했던 이유는, 학생들에게 명작의 향기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전공지식을 대중에게 소통시키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연구실과 강의실을 오가는 교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교수는 먼지가 쌓인 책들(죽은 시신들?)이 들어 찬 연구실(무덤?)을 지키는 주인(무덤지기?)인가. 자기만의 방 속에 자신을 유폐시킨 채 가끔씩 바깥세상을 두리번거리는 ‘쥐식인’인가. 이제 이런 자조적인 교수 상을 폐기하고, 전공지식을 대중과 소통하고 자신의 앎을 실천하는 새로운 교수 상을 지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비교문학가 에드워드 사이드, 언어학자 노옴 촘스키, 철학자 자크 데리다 등은 자신들의 학문적 울타리를 넘어서 앎을 현실 속에서 실천한 동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들이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 서구인들이 일방적으로 만들어 낸 허구적인 관념의 체계라는 점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촘스키는 사회평론가로서 미국 우파 행정부의 폭력행사와 전쟁 정당화 논리를 강도 높게 비판해왔다. 해체주의자 데리다도 유색인종 및 동성연애자 차별주의에 반대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그는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것은 곧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실천적인 지식인들의 사유와 삶은 여러모로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필자의 관심 분야 중 하나는 탈식민주의 담론이다. 이 담론은 백인-유색인, 남성-여성, 노동계층-지배계층, 중앙-지방 사이의 지배와 종속의 역학관계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탈식민주의는 타자를 정복, 착취, 억압, 차별하는 부당한 권력의 행사에 맞서 해방과 정의와 평등을 추구하는 실천적 담론이다. 이런 전공분야 강의를 통해, 필자는 학생들이 타자를 이해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길 주문한다. 칼 마르크스가 말한 바처럼,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교육과 연구는 대중과 소통능력을 극대화하고 사유를 현실세계에서 실천할 때 비로소 즐겁고 보람된 일이 된다.

실용학문과 경영마인드가 판을 치고, 교수가 유폐된 공간에서 갇혀 있는 한, 인문학과 기초과학은 더욱 외면 받게 될 것이다. 모두가 전공지식의 대중화와 세속비평 기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박종성/ 충남대·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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