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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주의적 종교문화 비판…일상경험의 종교적 고양 과제 남겨
도구주의적 종교문화 비판…일상경험의 종교적 고양 과제 남겨
  • 류제동 가톨릭대
  • 승인 2004.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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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서평_ ‘경험과 기억: 종교문화의 틈 읽기’(정진홍, 당대 刊, 2003, 472쪽)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세계는 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심장한 사실들을 제시해줬다. 그 중의 하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의 100년 가까이 공산주의 국가들의 중심이었던 러시아보다도 종교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각 종교에서 자체적으로 주장하는 신도 수를 다 합하면 한국 인구를 훨씬 넘어선다는 얘기나, 국토의 방

방곡곡에 성대하게 세워지고 있는 교회나 사찰의 건물들을 생각하면 이러한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모순처럼 느껴진다. 그러한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제시하고 있는 저서가 정진홍 교수의 저서다.

사랑과 자비로 포장된 종교 현실 비판

책이 발간된 이래 그의 제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하여 서평을 쓰거나 소개를 했다. 우선 장석만은 한겨레신문에 실린 서평에서 기존 종교의 설득력이 심하게 침식당하고 있는 까닭이 상투적인 질문과 동어반복의 폐쇄회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 있으며, 그러한 폐쇄회로를 끊어내는 데 있어서 자신의 경험을 수용하여 自己化한 기억을 바탕으로 새로운 개념과 물음을 만들어내는 것의 절실함을 피력하는 데 이 저서의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장석만의 서평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종교적이지 않다는 사실의 위기적 성격을 이 책이 예리하게 진단하고 있음을 잘 제시해주고 있지만, 이 책의 핵심적 취지를 적시하는 데 그치고 있다.

임현수는 장석만의 서평이 “한국의 대표적 종교학자 정진홍 교수의 어눌함이 열어줄 새로운 지평에 기대가 크다”는 말로 기대를 표명하는 데서 그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기존질서에 의해 형해화된 삶의 경험을 구원하는 일이야말로 시급한 과제임”을 이야기함으로써, 정 교수의 문제의식을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임현수도 자신의 동의를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있지는 않다. “기존질서에 의해 형해화된 삶”을 구체적으로 논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오늘날 세계 종교학계는 종교 관련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연구 차원을 넘어 현실 참여적 연구로 옮아가는 추세에 있다. 단순히 기술적(descriptive) 학문에 머물기보다는 규범적(normative) 학문으로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세에 비추어볼 때 정 교수의 저서는 종교문화 비판에 있어서 종교학자가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하여 주목할 만한 저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목을 기반으로 장석만이나 임현수의 추상적인 서평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존 종교들의 설득력에 대한 정 교수의 비판을 구체적으로 예시하여 이 책이 무엇을 다루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나라의 종교인들은 깊은 의미에서 본다면 태반이 종교인들이 아니라 종교를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세속적인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책은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그들에게 종교란 “자기중심적인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사랑과 자비의 깊은 내면은 사라지고 저주와 경멸이 허울뿐인 사랑과 자비를 뒤집어쓴 채 우리나라의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저주”와 “자비라는 이름의 경멸”이 한국 종교계 현실의 한 부분인 것이다. 가치관의 발전적 변화를 통해 종교인들의 인격적 성숙을 도와야 할 종교가 요지부동의 세속적 가치관의 지배하에 이익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의 도구 노릇밖에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이익에 몰두하는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자비’와 ‘사랑’이 충돌하는 종교간의 갈등은 역설적이지만 현실화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처럼 기존 종교의 설득력과 구체적인 삶의 자리가 서로 겉돌고 있는 상황에 대한 정 교수의 진단은 매우 시사적이다. 기존 종교가 우리의 삶의 경험에 보다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은 보다 심화될 필요성에 직면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매우 피상적인 차원에 머무를 수 있다. 세계적인 종교 연구자인 피터 버거나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도 현대 종교의 위기를 종교전통의 경직화에 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정 교수와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인들의 경험의 세계를 강조함에 있어서 성숙한 종교체험자들의 경험에 보다 집중한다. 정 교수가 다소 일반적으로 우리 자신의 경험에 호소하는 것과 달리, 그들은 보다 초월적인 경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곧 우리의 삶의 경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적 경험의 의미에 대하여 보다 철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정 교수처럼 우리의 일반적 경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종교가 일반인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긴요한 것일 수 있지만, 세속적 가치를 절대화할 우려가 있다. 예컨대 일반적 경험으로서 ‘건강’이나 ‘가정의 행복’ 등 ‘비종교적 가치’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으로 정 교수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건강’이나 ‘가정의 행복’이 궁극적 가치로 자리 잡을 때 자칫하면 지나치게 육체적 건강이나 자기 가정의 행복에만 매몰되어 정신적 내지 영적 건전성이나 낯선 이웃에 대한 무관심으로 흐를 수 있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을 무시하거나 거기에 매몰되는 양 극단을 떠나 일상적 경험을 종교적 차원으로 제고시키는 데 종교적 통찰의 힘이 있는 것이다.

신학 안에서의 해답찾기 노력 필요

달리 말하자면, 이 책은 신학이 그 자체의 문제제기와 해답제시의 고유한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심층적 측면을 다소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칼 바르트와 같이 초월주의적으로 보이는 신학을 전개하는 신학자들도 상당수 있지만, 신학은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의 표징을 읽고 거기에 신학적 해답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학문이라고 폴 틸리히 같은 저명한 신학자들은 뚜렷이 주장하고 있다. 다만 단순히 삶의 경험이 아니라 그 경험이 종교적 차원으로 고양되는 수준에서 문제는 제기된다. 예컨대 예수는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는 이스라엘과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구하는 로마의 차원을 넘어서는 하느님나라를 추구하면서 낯선 사람들을 하느님의 신성한 자녀요 우리의 형제로 바라보는 체험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각 종교전통의 신학체계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무시하던 대상들을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바라보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오늘날 학문의 규범적 역할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요청이 제기되고 있는 터에 정 교수의 저서는 기존종교의 경직화된 관성과 우리들의 삶의 자리 사이에 벌어진 틈을 메우고자 하는 노력으로서 주목할 가치가 있지만, 종교경험의 설득력에 관해 보다 정교하게 천착해야 한다는 과제를 남기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처럼 종교학이 기술적 역할을 넘어서서 종교 비판의 규범적 역할을 자임할 때, 신학과 종교학의 경계가 허물어질 가능성에 대한 적극적 논의가 있을 수 있다. 서구학계에서는 이미 배타적인 특정 신앙을 전제하기보다는 종교사전체를 기반으로 하여 보편이성에 호소하면서 초월적 전망을 추구하는 종교학적 신학 내지 세계 신학이 태동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공교육에 있어서 국가주의나 세속적 가치를 넘어서서 보편적 설득력을 지니는 초월적 가치관 교육이 절실하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류제동/가톨릭대·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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