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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반론'을 원한다
정확한 '반론'을 원한다
  • 홍기돈 문학평론가
  • 승인 2004.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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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반론 : 김예림 씨의 반론에 답한다

김예림 씨의 반론에 대해 홍기돈 씨의 재반론을 받았다. 홍기돈 씨의 재반론은 <재반론1>과 <재반론2>로 나뉘어 있다. <재반론2>는 김예림 씨의 반론에 대한 주요한 주장 5가지에 대해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지적했고, <재반론1>은 좀더 세부적으로 들어가서 쟁점이 되고 있는 <김동리>와 <이태준>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자세하게 기술하며 반박하고 있다. 지면관계상 오프라인 판에는 '재반론'이란 글의 성격에 부합하는 <재반론2>를 실었지만, 온라인판에선 <재반론1>까지 함께 싣는다.  / 편집자주

<재반론1>

김예림 씨의 말마따나 “상호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다. 반론의 장황한 논의를 요약하자면, 복잡한 상황을 단순한 논리로 재단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왜 단순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많은 부분 설명이 필요하겠기에 여기서는 두 가지만 지적하겠다.

김예림은 나에게 “문학 외적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재배치하는 입체적인 시선”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서는 작가를 둘러싼 구체적인 조건을 이해해야만 한다. 내가 ‘실증적 사실’을 강조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먼저 김동리를 보자. 김예림이 문제 삼는 시기에 김동리는 다솔사(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당시 해인사의 말사였던 다솔사가 어떤 곳인가. 주지는 효당 최범술이었다. 그는 3?1운동과 관련해 옥고를 겪었고,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최영환’이란 이름으로 의열단 핵심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귀국해서는 비밀결사체 만당의 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1934년 만해 한용운은 친일적 색채를 띤 세력에게 불교계 헤게모니를 빼앗기자 활발히 활동하던 인물들을 다솔사로 내려 보낸다. 이후 다솔사가 항일의 근거지가 됐던 것은 당연하다. 당시 내려갔던 이들 중에는 범부가 끼어 있었고, 김동리는 범부를 좇아 다솔사로 들어갔다. 첫 번째 부인 김월계와의 두 번째 결혼식 주례를 한용운이 맡았던 것은 이러한 연유다. 덧붙이자면, 영남권의 독립자금을 모아 서울까지 운송하는 일이라든가, 독립운동 모의를 위한 공간 제공, 지역인들의 교육 등을 다솔사에서 담당했다.

내가 김동리에게 주목하는 것은 ‘다솔사’라는 공간의 의미다. 김동리는 범부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있었다. 범부가 일경에게 두 번째 잡혀 들어갔을 즈음 김동리는 ‘문장’의 폐간을 계기로 절필에 나섰다. 다솔사에서 세웠던 광명학원이 일제에 의해 폐쇄되자 그가 심한 좌절에 빠졌던 것도 주의를 기울일 대목이다. 그가 그 곳의 선생이었던 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하는 김동리의 작품 해석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언급했으니 이만 한다. 그리고 일제의 검열에 의해 작품이 두 번 삭제됐던 사실이라든지, 친일문학단체 가입을 단호하게 거부한 사실 또한 전에 밝혔던 그대로다.

물론 김예림 씨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나의 입장이 “‘A이므로 B이다’ 식의, 오랜만에 접하는 튼실한 단순인과론”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복잡한 가능성의 지층들을 파 들어감으로써 올바른 역사적 전망을 모색”하고, 그 일환으로 김동리의 “문제적 징후”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실증적 사실에 대한 분명한 검증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과정과 논의를 배제하고 “문제적 징후”와 “정치적 무의식”만을 분석해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해 드러나는 것은 김동리의 욕망이 아니라 연구자 김예림의 욕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 과연 내가 “협소한 정황 증거에 매몰된 결과 대상이 지닌 복잡성을 다 몰수해버리면서 ‘실증’의 의미와 영역을 터무니없이 실추시키고 있”는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다음은 이태준에 대해서. “‘당연한 것’을 왜 ‘왜곡’하고 있는지” 따졌는가를 밝히는 일이 필요하겠다. 김예림은 ‘영월영감’의 주인공을 “금전의 논리에 의해 희생당하는 존재”로 파악했다. 나로서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아니, 금광 사업에 성공해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쓰겠다는 인물이 어떻게 그렇게 설명될 수 있다는 말인가. 해석이야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 김예림이 요구하는 바대로 나름의 “문학 외적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재배치하는 입체적인 시선”을 보여주도록 하겠다.

백산 안희제라는 인물이 있었다. 1909년 항일비밀결사 대동청년당을 결성한 바 있고, 1914년에는 백산상회를 세우기도 했다. 후에 백산상회는 영남의 지주 1백72명이 참여한 주식회사로 확대되는데, 겉으로 보자면 건어물을 파는 사업체에 불과했으나 기실 만주의 항일무장단체와 상해의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하는 데 건립 목적이 있었다. 또한, 영남의 어린 인재들을 독일, 영국, 일본 등지로 유학보내기도 했다. 백산상회의 지점?연락사무소는 대구, 서울, 원산, 만주 지역의 안둥[安東], 펑텐[奉天] 등지에 있었다. ‘臨政諜報 36호’였던 백산이 국내외 첩보 활동에 적극 개입했음은 물론이다. 1927년 활동 내용이 드러나서 백산상회는 문을 닫게 됐고, 이후 백산이 간여한 사업은 언론이다. ‘중외일보’ 사장으로 취임했던 것이다. 1933년경 그는 금광 사업에 성공해 모은 돈으로 만주로 건너가 ‘발해농장’을 세우기도 했다. 발해농장이 이민 간 우리 농민들의 보금자리가 됐음은 물론, 독립군과 교섭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백산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하는 까닭은 이태준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원산에서 유리걸식하던 이태준이 2년 동안 사환으로 몸을 맡겼던 곳은 백산상회 원산 지점 ‘물산객주 김상훈’의 집이었다. 동맹휴학 주도로 휘문고보에서 쫓겨난 이태준은 일본으로 건너갈 때도 백산상회의 도움을 받는다. 불온분자로 낙인 찍혀 도항증을 발급받지 못했던 그가 백산상회로 찾아갔고, 백상상회에서는 그에게 유학길을 열어 줬다. 이태준이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문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사실이야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태준이 입사할 당시 ‘조선중앙일보’는 전신인 ‘중외일보’였다. 그러니까 사장이 백산이었다는 말이다. 자, 그렇다면 보자. ‘영월영감’의 모델은 백산과 아주 무관하겠는가. 영월영감의 전면에 배치된 강렬한 민족의식은 그냥 무시해도 상관없는 치장에 불과하겠는가.

독립운동에는 돈이 든다. 백산에게는 모래알로 쌀을 만들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 능력이 없었다. 그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김예림처럼 “금전의 논리에 의해 희생당하는 존재”라 비판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의문이다. 김예림이 강조하는 복잡성은 내가 갖는 의문을 해명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작가의 “정치적 무의식”을 분석하는 데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구체적 사실을 통해 그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구체적 사실 밖에서 길어오는 “정치적 무의식”이란 아른한 봄날 그림자와 희롱하는 어린 아이의 장난에 불과하다.

<재반론2>

나는 구체적 사실을 적시하며 비판하였다. 그렇지만 김예림은 이를 논박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A이므로 B이다’ 식의, 오랜만에 접하는 튼실한 단순인과론”이란다. 그러면서 나에게 “문학 외적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재배치하는 입체적인 시선”을 요구한다. 쉬운 일이다. 만해 한용운이 어떠한 연유로 김동리의 주례를 맡았던가. 임시정부 운영자금의 60% 이상을 제공했던 臨政諜報 36호 백산 안희제는 이태준과 어떤 관계였으며, '영월영감'에는 그가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이를테면 이러한 사실을 설명하면 되리라고 본다. 김동리, 이태준의 사상적 맥락이라든가 삶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테니 말이다.

김예림은 “한국의 식민지 체험의 내면을 ‘끊임없이 표층을 배반하는’ 어떤 것으로 파악하고자 했고 이 어긋남의 구조를 규명하고자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김예림은 ‘배반했다’고 주장하기에 앞서서 ‘어떻게 배반하는가’를 보여줘야만 한다. 그렇지 못했기에 나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비판했던 것이다. 김예림은 ‘정치적 무의식’을 들어 나의 비판을 회피한다. 그렇지만 ‘정치적 무의식’은 언어의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무언가를 드러내는 동시에 무언가를 은폐한다. 숨기고자 하는 내용을 밝혀내는 것이 무의식 분석 아닌가. 내가 실증을 강조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구체적 사실을 매개로 해 은폐된 부분을 밝히라는 요구다. 그런데도 김예림은 “정황 증거의 허망한 자명성을 배반”하겠다고만 한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김예림의 욕망이 아니라 김동리와 이태준의 욕망이다. 그걸 보여주기 바란다.

“나는 ‘조선’이라는 이념어가 당시 ‘일본’과 대립각을 갖는 것이 아니었음을 규명했다”라고 김예림은 주장한다. 여기에도 김예림의 욕망이 개입돼 있다. 물론 ‘조선’을 ‘일본의 지방’으로 설정해 세계를 파악했던 이들이 당시 존재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을 이야기한 이들 모두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김예림에게는 이 말이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이니 예를 들어 주겠다. 지금 국가보안법 철폐 반대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한다. 단지 국가보안법을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나를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는 부류로 집어넣는 일이 온당한 일인가.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을 애도해 광화문에 촛불시위대가 운집한 적이 있다. 어떤 학자는 여기서 파시즘의 징후를 읽어냈다. 그런 마당에 일제에 강하게 반발한 김동리에게서 친일의 욕망을 읽어내고자 하는 시도는 어쩌면 당연한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정확한 사실에 입각해 논의를 전개했으면 좋겠다. 자, 김예림은 이러한 지적도 단순인과론으로 폄하할 생각인가.

‘미의식의 정치성’은 이와 이어진다. 당연히 미의식에도 정치성이 개입한다. 나는 그러한 성격의 ‘조선’을 전제로 해 김동리의 미의식을 설명했다. 김예림은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김예림이 조연현을 통해 그러한 주장을 했다면 흔쾌히 수긍했을 것이다. 조연현은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의 미의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여기에 정치성이 개입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카쿠라가 종교?예술적인 견지에서 ‘아세아는 하나다’라고 말했던 반면, 동아공영권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아세아는 하나다’라는 사상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이전에 벌써 아세아는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될 본질적인 요소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아세아부흥론 서설’) 조연현이 말하는 ‘본질적 요소’와 역사적 정황 사이에는 틈새가 존재한다. 그 틈새를 비집고 ‘정치적 무의식’이 튀어나온다. 김동리에게 과연 그런 틈새가 있었던가. 만약 있었다면 김예림은 그걸 보여주기 바란다.

이태준에 대해서는 반복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태준의 변화를 얘기하며 ‘참다운 예술가 노릇 이제부터 시작할 결심이다’를 적시했다. 이 글에서 이태준은 그 동안 때를 기다려왔다고 누차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기다리는 때는 오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마냥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결심은 이 순간 이뤄졌다. “내 취미에 맞는 인물을 붙들어 가지고 스케치나 공부하면서 제작 생활을 할 수 있는 때를 기다려왔다.…(중략)…나의 작품에 애수는 있고 사상이 없다는 것은 가장 쉽고 또 정확한 지적들이다. 그러나 이 작가는 이런 범위 내에서만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은 속단이다.” 그렇다면 변화의 내용은 어떠한 것인가. 나는 ‘영월영감’의 한 대목을 인용하여 밝혀 놓았다. “우리 동양 사람은, 우리 조선 사람이지, 자연에들 너무 돌아와 걱정이야.…(중략)…자연으로 돌아와야 할 건 서양 사람들이지. 우린 반대야. 문명으루, 도회지루, 역사가 만들어지는 데루 자꾸 나아가야 돼….”

주지하다시피 대동아공영권이 강조될 즈음 동양적인 정서가 강조됐다. 여기에는 물론 정치적인 배경이 작동한다. 이태준이 동양적인 정서를 읊던 시기는 대동아공영권이 위세를 떨치기 전이었다. 암울한 시기에 이르자 그는 오히려 동양적인 정서의 강조를 경계하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생활’을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생활은 ‘역사가 만들어지는 데’에서 펼쳐진다. 이러한 이태준의 변화는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단지 동양적 정서를 근거로 대동아공영론의 동조자로 ‘아주 쉽게’ 몰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예림은 “이태준에 대해서 씨는 ‘대동아공영권이 발흥할 즈음’ 그가 ‘생활의 부분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고 했는데 ‘생활’에 눈 돌린 게 ‘저항’의 지표가 된다는 식의 논의가 도대체 어떻게 성립하는지 모르겠다. 근거가 부족한 비약이다”라며 이러한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자 한다. 나로서는 독자의 판단에 맡길 따름이다.

김예림은 “일제 말기의 역사적, 사상적 지평을 검토하고 인식론적, 미학적 지형도”를 그리겠다고 했다. 제대로 그려주기를 바란다. 친일을 변명하는 하나의 논리가 있다. ‘당시에는 모두가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어.’ 김예림의 연구가 그 옆에 놓이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끝으로 한 가지 부탁한다. “김동리와 ‘범부’의 관계를 들어 김동리가 ‘친일로 넘어가지 않았던 사상적 근거’의 하나로 들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이미 비판적 해석이 나온 바 있다.”라고 김예림은 주장했다. 과문한 탓에 아직 그 ‘비판적 해석’을 접하지 못했다. 구체적으로 가르쳐주면 거기에 대한 나의 입장을 논문의 형태로 밝히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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