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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과학문화연구의 '20년 제자리걸음'을 돌아본다
진단: 과학문화연구의 '20년 제자리걸음'을 돌아본다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4.10.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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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실에 기반해야...市民참여적 과학문화 필요

편집자주 : 본 기사에 인용된 장대익 카이스트 강사의 코멘트가 원래의 문맥이 많이 생략된 채 기사의 중간중간 인용됨으로써, 본의 아니게 장대익 씨가 갖고 있는 과학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을 결과적으로 변형, 왜곡시키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이 부분에 한해 인터넷 판에서 기사를 수정하였습니다. 독자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과학기술이 축적되고, 과학의 영향력이 막강해짐에 따라 제대로 된 과학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학계도 과학문화에 대한 연구와 과학문화론을 표방하는 책들을 내놓고 있다. 국회도서관 등에서 ‘과학문화’로 검색을 하면 1백여 편이 조금 넘게 출력된다. ‘과학과 기술’, ‘과학사상’, ‘과학문화연구센터논문집’, ‘과학기술정책’ 등이 주요한 논문 배출처다. 이들 논의는 크게 과학문화 정착을 위한 논의, 해외과학문화 소개, 과학기술의 윤리성 논의, 동양사상과의 접합, 과학교육 등으로 나뉜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은 1980년대 논문과 2000년대 논문의 제목이 비슷비슷한 것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또한 과학문화를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정책연구에 가까운 것들이 대다수를 이루며, 과학철학, 과학학, 과학사에서 자라나온 출신성분이 오묘한 논문들이 그 나머지를 이루며 진짜 ‘과학문화’에 대한 논문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현재 과학문화 연구논문들이 담고 있는 내용들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한국현실’이 삭제된 보편담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해 최근 비판적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추상적인 이론적 논의들로만 일관하며, 실제 과학자·공학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있지 않으며, 기존의 연구 틀에 갇혀 관성적으로 과학문화를 논의해서는 과학문화는커녕, 과학이 제대로 발전하는 일조차 가로막을 것이라는 견해들도 있다. 

‘과학’이 빠진 과학문화론

장대익 카이스트 강사(과학철학)는 “과학문화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들의 논의 중에 정작 과학자의 목소리는 잘 반영되지 않는다”라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최첨단 정보기술 문화를 논하거나 양자역학 등을 논하면서 그 주제들을 실제로 연구하는 사람의 경험과 생각이 문자로 재현되고, 토론의 주제로 떠오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매개되지 않은 채 ‘과학학자’들끼리 과학문화를 논하고 있으니 상부구조를 하부구조에 심기 위한 탑-다운 방식의 주문밖에는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논의’가 아니라 ‘주장’일 뿐이며, 그것도 ‘근거’가 빠진 주장인 셈이다.

장 씨는 자신이 과학문화연구자들의 작업에 대해서 전문적 코멘트를 할 처지가 아니라는 점을 밝혔지만, "외부자의 시선이 필요하다"는 기자의 요구에 따라 몇가지 의견을 더 밝혔다. 곧 지금 “과학문화 연구자들이 하고 있는 기초 작업은 첫단추를 제대로 끼우기 위해 꼭 필요하고 소중한 작업인데, 너무 오랫동안 이 분야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는 점을 지적한다. 물론 한켠에선 과학자들과 소통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는 불평이 나온다. 장회익, 최재천 교수 등 몇몇을 제외하곤 대부분 과학자들이 기술연구에만 빠져있고 사회문화적 연관성을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 때문에 과학문화 연구자들의 메타적 고민부재와 현 과학학 논의에 대한 비판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이인식 과학문화연구소장 역시 현재 과학문화론이 기술을 배제한 채 논의되는 것에 대해 “국내 과학기술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는데 무슨 문화냐”라고 반박한다. 현대과학이 기술, 성장 중심으로만 편향되게 발달해온 결과를 두고 볼 때, 이 씨의 지적 역시 편향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씨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 역시 ‘소통’문제다. 생물학-화학, 천문학-물리학 등 학문 간의 소통과, 과학-인문학과의 소통, 과학자들과 대중간의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현재 과학문화 연구의 경향을 두고 “몇몇 서울대 교수들이 주도하는 유행”이라고 꼬집는다. 이 소장의 이런 판단은 현재 과학문화연구센터 연구들이 공학기술보다는 ‘기초과학’에 쏠려 있다는 점에 기대고 있다. “나노기술 같은 공학의 대중화가 급선무다. 생물학, 물리학, 천문학은 맨날 같은 얘기며, 과거 중심적”이라는 지적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장의 견해 또한 문제가 있다. 이중원 서울시립대 교수(과학철학)는 “오히려 한국은 과학기술발전에 비해 과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라며 “과학문화 연구까지 공학중심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문제는 기술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기보다는 현재 과학문화연구센터의 활동들이 이벤트 중심으로 가다보니, 깊이 있는 연구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데 있다”라는 게 이 교수의 지적이다.

대중적 글쓰기=과학문화 연구?

정말 문제는 현재 대부분의 과학자, 과학학자들은 “한국에 제대로 된 과학문화가 있는가”라고 반문할 정도로 과학문화연구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과기부의 지원을 받는 ‘과학문화연구센터’(센터장 정광수)의 연구 활동에 대해선 ‘문화’의 이름만 빌렸을 뿐이라는 강한 비판적 입장도 개진된다. 김동광 참여연대시민과학센터 소장은 “과학문화연구센터라는 명칭은 레토릭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한다. 전북대-서울대-포항공대 등 삼각 거점체제로 운영되는 이 센터는 단지 전국에 생기고 있는 과학학 협동과정 연구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예산수주처’일 뿐이라는 것.

하지만 이것이 잘못됐다거나 문제가 될 소지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 곳이 내놓는 연구물의 ‘질적 수준’이 이름에 걸맞게 이뤄지는가에 평가의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 과학문화 연구자들이 내놓은 상당수 논문들은 ‘과학문화 개념과 의의’부터 ‘비판적 재구성’까지 논하고 있지만 논의의 수준은 초보적이다. 김동광 씨는 이들 연구에서 자주 언급되는 ‘문화’의 개념을 문제 삼는다. “문화란 아래로부터 형성되는 것인데 과학문화 연구랍시고 정책을 수입하고 한국에 맞게 다듬는 수준일 뿐”이라고 거세게 비판한다. 연구논문들의 수준에서는 거의 외국논문들의 ‘재구성’이라는 비판이 압도적이다.

현실의 과학문화를 분석하기 전에 개념정립이 우선돼야 한다는 과학문화 연구자들의 의견은 심각한 자기모순들을 수시로 내비친다. ‘과학’과 ‘문화’의 개념을 결합시키는 것은 그러나 일반론이라는 한계가 있고, 그 일반론 속으로 현실을 포섭하려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아무리 기초 연구로서 서구에서 세련화된 개념과 이론적 연구를 소개하고, 연구틀을 고민한다 하더라도, 과학문화의 주체, 그 주체들이 몸담고 있는 제도들, 국가와 과학기술간의 상호관계 등에 대한 분석적 접근을 통한 구체성의 단계적 개념화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과학문화론의 물꼬는 트여질 수 없을 것이다.

조환규 부산대 교수(생물정보학)도 현재 이뤄지는 과학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 과학문화와 다원주의, 과학문화의 다각적 고찰, 과학문화의 바람직한 방향, 과학문화의 역사사회학적 고찰, 과학문화의 철학적 진단, 과학문화의 이념 등이 “1980년대부터 이뤄져 온 것”이라며, “지나치게 지식인들끼리의 추상적 논의에 갇혀 있다”라고 평가한다. 추상적 논의는 결과적으로 ‘학문의 식민지성’으로 귀결될 우려도 높다. 물론 그것에 대해 예민하게 의식한 논문이 있어왔다. 도가사상(장자), 역학 등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을 접목해 동양의 전통에서 한국과학문화의 원형을 찾으려는 시도들 말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장대익 씨는 비교연구의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서구사례를 모델로 삼거나 동양사상이 현대과학기술을 치유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공허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박진희 가톨릭대 연구원(과학기술사)도 “소위 원형을 찾아가는 동양사상과의 접합이 현대과학에 얼마나 맥이 닿을 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라고 말한다. 그 외에 “과학문화 연구를 단지 기존 과학학 연구들을 좀더 쉽게 풀어쓰는 정도로 여기는 풍토도 있는 것 같다”라고 지적도 나온다. 이는 과학의 대중화와 연구를 통한 과학문화 논의라는 두가지 차원이 서로 명확히 제 영역을 갖지 못한채 뭉뚱그려져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오히려 근대의 구체적인 역사들을 연구하는 게 급선무라는 게 박씨의 말이다. 이를테면 18~19세기 서구과학이 도입돼 전통과학과 갈등을 일으켰던 과정을 보면, 전통과학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인데, 최근 남문현, 한영호, 이영삼을 비롯해 전용훈, 임종태 교수의 연구는 조선과 근대의 전통과학에 대한 실증적 연구로 인정을 받고 있다. 물론 ‘과학사’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라 그 결과물들을 어떻게 현실의 척박한 ‘과학문화’와 연결시켜 논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채 고민되지 않고 있다.

과학문화, 어떻게 논할 것인가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유형이든 무형이든 제도적인 측면에서의 지속적인 과학문화라고 할 만한 것의 ‘생산’이 일단 주요 과제로 여겨지고 있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럴 때 최근 시민과학센터에서 ‘전력정책의 미래에 대한 시민합의회의’를 꾸린 것은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생명공학, 원자력 등 최첨단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합의회의를 시도한 바 있는데, 전문가와 일반 시민이 과학기술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렇지만 시민단체는 ‘정책’에 대한 ‘참여문화’를 조성하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에 여기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다양한 섹트로 존재하는 과학자집단에 대한 구조적 묘사, 과학제도 비판과 담론화 등이 필요하다. 물론 현상에만 치중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중원 서울시립대 교수의 말처럼 “문화연구는 현상도 중요하지만, 토대전반을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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