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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철학을 공부하는가
왜 철학을 공부하는가
  • 이승택
  • 승인 2021.05.12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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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나는 학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는 철학을 공부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서로 다른 학문을 공부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나의 이런 이력을 알게 되는 사람들은 내게 무엇에 이끌려 전공까지 바꿔가며 대학원에 진학했는지를 묻곤 한다. 그러면 나는 약간의 농담조로 “철학만큼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도 없지 않느냐”라고 반문한다.

학부 시절 경제학 수업을 들으며 연습문제를 풀고 경제 서적을 탐독하는 일은 분명 흥미로웠다. 다양한 사회 현상에 엄밀한 수학적 기법을 적용해 계량화하고 가설을 세워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론은 특히 매력적이었다. 당시의 화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와 빈부격차 등의 문제였다. 나 역시 이것이 무척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고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의 진단이 궁금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학자들의 견해에는 일치하는 바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서로 같은 현상을 진단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사실 다른 학문이라고 해서 학자들이 동일한 현상—그것도 아주 구체적인 경험적 현상—에 대해 늘 일치된 견해를 내놓지는 않는다는 것을 지금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경제학의 실증적 방법론과 수학적 엄밀성에 경도됐던 당시의 나에게 저명한 경제학자들의 불일치는 이 학문에 무언가가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인상에 불과한 문제의식을 어떻게 파고들어야 하는가? 고민스러웠다. 무엇이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는지를 따진다는 것은 그것이 토대로 삼는 근본 가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이다. 또 근본 가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은 우리가 가진 근본 개념을 면밀히 살펴보는 일을 반드시 포함하기 마련이다. ‘모든 행위자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가정이 옳은지를 알려면 합리성 개념을 따져볼 수밖에 없다. ‘완전 경쟁은 시장의 효율성을 극대화한다’는 가정이 옳은지를 알려면 경쟁, 시장, 효율성 개념을 따져볼 수밖에 없다.

철학은 이런 근본 개념을 비롯해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신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앎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존재하는가?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들은 애초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철학에 이끌린 결정적 이유는 바로 철학이 이런 고도의 추상적인 질문을 그저 던지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대로’ 던질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는 데 있었다.

이를테면 ‘앎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심오하게 들리지만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기에 그리 유용하지 못하다. 반면 ‘한 주체 S가 명제 p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훨씬 구체적이고 접근 가능하다. ‘인과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는 ‘한 사건 c가 다른 사건 e의 원인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명확하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준다.

철학의 역사를 보면 이렇게 질문 자체를 재고하고 다듬는 일이 아주 빈번하게 일어난다. 질문의 요점 자체를 구체화하고 숨은 전제를 따져보면서 문제의 설정 자체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기될 수 있는 새로운 비판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철학의 과업이 고도로 복잡하고 추상적인 문제를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는 수준까지 잘 다듬어 개별 과학에 넘겨주는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비판에 열린 태도와 근본적인 것에 대한 관심에 이끌려 나는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제 개방성과 근본성은 연구자로서의 나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지 고민한다.

물론 다른 학문을 공부하는 연구자에게도 이러한 태도는 바람직할 것이고 또 각자가 실제로 알게 모르게 추구해 나가는 모습일 테다. 다만 이렇게 사적인 경험을 공유하면서 동시대 연구자들과 공명하고 그들에게 가닿기를 바랄 뿐이다. 연구자로서 살기로 결심했던 처음의 그 감정을 고스란히 남겨두면서, 오늘도 긴 호흡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을 이 땅의 다른 연구자들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이승택

서강대에서 경제학을, 연세대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UCLA) 철학과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언어철학』, 「지칭에 관하여」, 「논리와 대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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