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7:20 (금)
시간강사의 아기 출산 사연
시간강사의 아기 출산 사연
  • 이영애 단국대
  • 승인 2001.05.1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1-05-16 09:08:37

이영애 단국대 교양학부 교수

올해로 초등학교 3학년이 된 큰 아이가 어버이날이랍시고 풀에 절어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꽃을 가슴에 달아주었다. 부모라고 생긴 사람은 모두 그렇겠지만, 순간 콧등이 시큰해지고 가슴이 울렁거려 표정을 관리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큰 아이를 가졌을 때는 시간강사 시절이었는데, 물색 없이 임신을 하게 되어 9월 중순에 진통을 겪었다. 교수직을 가진 사람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시간강사 시절의 힘든 고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시간강사로서의 서러운 경험이야 너나없이 겪는 것이지만, 책 보따리 들고 이 학교 저 학교 뛰랴, 학교눈치 학생눈치 보랴, 연구실적물 내랴, 시간 맞춰 채점하랴, 눈코뜰새 없이 지내는 가운데 부득부득 다가오는 출산예정일은 정말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참으로 박사학위시절의 포부와 희망은 오간 데가 없었다.

물론 비정규직 시간강사로서 한 학기 강의를 쉴 수도 있었지만, 학계의 인연이라는 것이 임신을 이유로 놓아버리면 다시 연결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참으로 무모한 도전을 하였다. 때마침 추석연휴로 한 주가 거의 휴강이 되어버렸던 것이 천운이라면 천운이랄까. 나는 아이를 낳은 지 두 주만에 강단에 섰다. 강의 중 내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오지 않는 아득함도 있었고, 불어 오르는 젖을 감당하지 못해 쩔쩔맸던 기억도 새롭다. 우여곡절 끝에 낳은 아이가 오늘 아침 내게 종이꽃을 달아주었다.

추석연후 2주동안 산후조리

모성보호법이 제정될 것이라는 소식을 맨 처음 듣고 나는 위와 같은 추억 아닌 추억을 새삼스럽게 되살렸다. 물론 교단의 특수성이 일반 기업체의 노동조건과 좀 다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는 것이 여성만의 일이 아니고, 낳은 아이가 커서 여성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성의 노동조건과 무관하게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국가가 보호해야 할 필요성은 너무도 분명하다. 이제야 가정과 사회의 유기적 연결이 조심스럽게 이어진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90일 산전산후휴가가 법적으로 보장된다 하더라도 위와 같은 기막힌 해프닝도 있을 것이고, 직장의 분위기에 눌려 제풀에 휴가를 반납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결혼 및 임신퇴직 권장의 관행도 더 강해질 수 있을 테지만 어쨌든 소수의 여성이라도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이라는 느낌이었다.

임신과 출산 보호는 국가책임

그러나 이러한 소박한 기대는 2년이나 기다려야 현실화될 모양이다. 사실 2년 유예도 그때 가봐야 알 일이다. 모성을 보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정계와 재계의 입치레는 현란하지만, 정작 누가 어디서 돈을 마련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서로 등을 떠밀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의 국가경쟁력을 짊어지고 갈 숨은 인력은 여성이라느니, 미래의 사회는 여성중심이 될 것이라는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장밋빛 그림은 모성보호법 2년 유예로 색이 바래고 말았다. 이래저래 출산율은 떨어질 것이고, 결국 능력 있는 한국인의 수가 점차 줄어들게 될 때에야 국가는 부랴부랴 천문학적 예산을 들여가며 출산장려정책을 펴게 될 것이다. 여성은 누구를 위해 아이를 낳는가? 나는 오늘 아침 꽃을 달아 준 딸아이에게 미래의 네 자식보다는 현재의 너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살라고 말하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