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23:20 (금)
정치적 삶에 대한 통찰 돋보여…철학없는 '개혁공학' 비판
정치적 삶에 대한 통찰 돋보여…철학없는 '개혁공학' 비판
  • 이동수 경희대
  • 승인 2004.10.2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본격서평_‘현상학과 정치철학’(김홍우 지음, 문학과지성사 刊, 1999, 756쪽)

김홍우 교수의 ‘현상학과 정치철학’은 그 제목과 두께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책이다. 정치사상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정치학을 현상학과 연결시킬 때, 당혹감을 느끼기도 한다. 1999년 출판된 이 책은 이듬해 ‘한국백상문화출판상’을 수상하고 그 권위를 인정받기는 했지만, 여기 포함된 화두나 문제의식이 학계의 지속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예전의 글들을 모은 논문집의 형태로 구성되어 하나의 주제로 관통하고 있지 못하고, 더욱이 이런 약점을 보완해주기 위해 필요한 서론 부분마저 빠져있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는 훗설에 대한 김 교수의 해석과 슈츠가 훗설을 비판할 때 사용하고 있는 훗설의 논지가 상충되어, 어느 것이 진짜 훗설의 현상학인지 모호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자들이 책의 제목에서부터 기대했던 현상학이라는 철학과 정치학의 연관성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이 책을 스트라우스식으로 ‘내밀한(esoteric) 독서’를 해보면, 단순히 정치철학서가 아니라 새로운 시각에서 현실정치에 관해 논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그 책의 의미를 되새기며 오늘의 정치현실을 바라보면 현실의 모습이 새롭게 다가오는 한편, 그때서야 비로소 그 책이 말하고자 한 의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런 내밀한 독서를 바탕으로 그 책에 대한 현상학적 입장에서의 ‘내재적(inherent) 비평’을 시도해보고자 하며, 이런 접근방식이 생산적인 논쟁과 이를 통한 지적 축적에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개혁'의' 철학을 찾아서

그러면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필자의 독해에 따르면, 그 책은 현 정부의 정치적 목표인 ‘개혁’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다 볼 것이다. 현재의 개혁은 그 동안 중앙집권적, 권위적, 기득권 중심적이었던 정치를 분권화시키고 모두가 공평하게 살 수 있는 세계를 지향한다. 하지만 김교수의 정치현상학은 그 개혁정책을 생활세계(life-world)를 반영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로 평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현상학적 입장에서 보면, 현 정부의 개혁정책은 개혁에 ‘대한’ 철학은 있을지언정 개혁‘의’ 철학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현상학에서 ‘현상(phenomenon)’은 ‘경험(experience)’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을 대체하는 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경험’이라는 용어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전제하고 리얼리티를 인식하고자 하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적실성을 놓치기 일쑤다. 주관적 경험주의는 주체의 실존적, 심리적 경험을 토대로 세계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반면, 객관적 경험주의는 부분적인 감각적 경험을 실증성의 정당화를 통해 보편화시켜 세계를 재단하고 처방을 제시한다. 하지만 두 방법론 모두 주체와 객체가 서로 뒤엉켜있는 리얼리티를 왜곡시키고 그럼으로써 주관 또는 객관에 대한 억압을 수반한다.

이와 달리, 현상학은 리얼리티를 지향성(intentionality) 구조 속에서 “지향하는 의식인 노에시스(noesis)와 지향된 대상인 노에마(noema)가 결합된” 현상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사물이나 세계는 단순히 객관적 사실이나 데이터가 아니라, 훗설의 주장처럼 인간의 생활세계에서의 실천적 동기와 의도를 포함하며, 또 슈츠가 강조하듯이 다른 사람과의 상호주관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현상이다. 요컨대 “지각주체의 대상으로의 내재적 몰입”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가장 리얼리티를 중시해야 하는 정치에는 현상학적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정치를 “인간의 자족적 삶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최고 단계의 인간적 결합”으로 간주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실제에 대한 민감성과 책임성이 포함돼야 한다. 즉 정치현상학은 독단적 꿈에 사로잡혀 현실문제에 무감각해서는 안 되고 “현장의 상황에 민감”해야 하며, 또한 인류의 공복으로 복무하면서 “인간의 삶에 대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이러한 실제성을 고려할 때 정치현상학은 모든 독단주의에 도전하는 한편, 일상인의 모든 의견(doxa)의 양상(how)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것에 철저하게 책임을 지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정치현상학이 전제하는 정치(the political)는 정치판(politics)과 다르다. 여기서 정치판이란 “‘전문적’ 또는 ‘직업적 정치꾼’에 의해 구성된 ‘직업적 정치’로서 실제현상을 고려하고 반영하는 대신, 자신의 독단으로 일상세계를 ‘조종과 통제’ 즉 엔지니어링하려는” 것인 반면, 정치는 인간적 결합이라는 전제 하에 구성원들의 동기와 의도, 의견의 개진과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정치현실에서 최고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엔지니어링에서 대화와 소통으로

그러므로 정치에서 가장 강조되는 덕목은 엔지니어링과 반대편에 서있는 대화와 소통이다. 이때 대화와 소통은 단순히 정보교환의 차원이 아니라 ‘사건으로서의 대화와 소통’이 될 때에만 노에시스와 노에마, 즉 주관과 객관을 상호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구성원들의 실제적인 대화와 소통의 정치행위를 통해 정치개혁이 추진될 때에만, 비로소 개혁에 ‘대한’ 엔지니어링적인 철학 대신, 개혁‘의’ 철학이 생길 수 있다. 요컨대 개혁의 진정한 열쇠는 “개혁의 결과를 실제로 사용하고 소비해야 할 당사자들의 목소리들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김교수의 논지는 오늘날 개혁이 왜 그렇게 국민적 반발에 직면하고 있는지, 그리하여 왜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국민통합을 저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득력있는 설명을 제공해준다. 하지만 모든 실제성의 양상이 드러나기 위해 요구되는 의견수렴과 대화, 소통의 과정은 너무나 많은 시간과 비용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구성원들의 의견과 동기, 상호작용은 시간성 속에서 자기변화를 겪으며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개혁을 완전한 합의나 만족스러운 소통의 결과로 형성된 개혁‘의’ 철학에 근거해서 밑그림을 그리고 추진해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또 다른 현상학자인 가다머의 해석학을 원용해보는 것은 어떨까. 즉 처음에 세우는 개혁의 밑그림을 마치 선이해(pre-understanding)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이 선이해로서의 개혁에 ‘대한’ 철학이 현상에 대한 민감한 감각을 통해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면, 즉 상황에 대한 이해와 비평, 물음과 대답의 과정, 전통과 미래에 대한 개방성 등으로 인해 이해변화의 과정을 겪어 지평융합(fusion of horizons)을 추구한다면, 개혁에 ‘대한’ 철학이 전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 정부의 태도는 여전히 실망스럽다. 비록 그것을 ‘조종과 통제’를 추구하는 엔지니어링의 전형으로서의 개혁으로 평가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그러나 개혁에 ‘대한’ 철학의 밑그림을 선이해로 간주하고 그것이 대화와 소통의 공론장 속에서 지평융합이 될 수 있도록,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개혁‘의’ 철학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하는 노력과 과정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이동수/경희대·정치사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