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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保守, 비사유의 강박
문화비평: 保守, 비사유의 강박
  • 김영민 한일장신대
  • 승인 2004.10.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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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jk.ne.kr

뒤랑은 모든 사회적 변화의 근저에 ‘포화(saturation)'의 현상이 들끓는다고 했다. 사실, 임계점의 논리로써 사회변동의 이치를 설명하는 것은 범박한 노릇이다. 다윈이나 마르크스, 프로이트나 니체 등, 20세기의 지적 환경을 조성한 대가들은 이 점에서 그 방법을 나눈다. 이들은 모두 플라톤-뉴턴-칸트 계열이 생략한 포화와 臨界의 현상, 혹은 시간성에 주목한다. 거칠게 요약하면, 이른바 ‘역사(학)의 시대'인 19세기 이후의 현대 지성계는 ‘시간이 익는 법'에 돌이킬 수 없이 순치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진보는 그저 시간이 익는 법에 합리적으로 대처하는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익은 것을 날 것으로 되돌릴 수도 없는 법이거니와, 익은 과일이 터져 썩도록 따먹지 않는 짓도 어리석다. 갖은 종류의 攝動에 노출된 지구상의 역사에서 시간이 익는 것을 피할 도리는 없으니, 그래서 ‘진리도 시간의 딸'(Veritas filia temporis)이라고 했을 터다. 포화와 임계 역시 이 時熟과 연동하는 현상으로 자연스럽다. 이 시숙에 대응하는 방식 속에서 인간의 역사와 문화는 사조와 유파, 진보와 보수의 갖은 갈래를 이루는 것이다.


시간이 익는 것은 ‘자연'이지만, 그 시숙의 열매를 인류의 역사 속으로 수확하는 일은 문화이며 ‘작위'다. 퇴행, 고착, 정체, 사회진화, 개혁, 혹은 혁명은 모두 그 작위의 여러 양상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진보는 시숙의 열매를 적극적으로 수확하고, 그 미래를 선취하려는 지속가능한 감성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이러한 감성이 사회적 공론의 스테레오타입과 그 空回轉에 의해 마멸될 때, 그 사회는 정체와 고착과 퇴행의 길 없는 길로 빠져든다. 그제서야 우리는 ‘시간이 익는 데에도 비용이 든다'라는 사실을 값비싸게 체득하는 것이다.


결국, 보수는 진보의 비용인 셈이지, 그 逆이 아니다. 일찍이 만하임이 시사했듯이, 보수주의라는 비용은 무슨 이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본능에, 바로 그 존재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본능이 그 본능과 일치하는 것이고, 존재가 그 존재와 일치하는 자기동일성의 집단적 고착인 것이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오직 이론의 부재에 따른 恐慌이며, 사유가 아니라 非思惟의 강박에 지나지 않는다. 고진(柄谷行人)은 그의 '交通' 개념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과거의 어느 한 원인에 고착된 사회는 본질적으로 신학적인 사회라고 꼬집는다. 한나 아렌트도 그의 명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미래의 한 목표 속에 고착된 사회 역시 종말론적인 폐쇄 사회라고 비판한 바 있다.


2004년의 가을은 시숙과 시대의 징조에 대항하는 보수의 물결로 떠들썩하다. 변화를 거부하려는 이들의 행태는 강박적이고, 한편 인생의 榮枯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듯 차마 불쌍해 보이기조차 한다. 비사유와 무이론의 본능적 고착은 필연적으로 역사의 현기증을 초래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 현기증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탈하는 지경에 이를 때, 보수는 집단적 패닉에 휩쓸린다.


본능과 존재의 자기동일성으로 버티고, 비사유의 강박으로 지탱해왔던 한국의 보수들이 집단적으로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실, 워낙 정신도 이론도 없었으니 남은 것이라곤 몸 밖에 없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수구화 하는 보수의 몸은 계절보다 더 빨리 사라지고 말 것이다. 현실의 삶을 섬기지 못하는 보수 종교를 퇴화의 한 형태로 파악한 신화학자 캠벨의 지적처럼, 문제는 날로 익어가는 우리의 삶이며, 따라서 그 삶을 섬기지 못하는 이념은 늦가을의 낙엽처럼 바스라져 갈 것이다.

김영민 / 한일장신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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