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7 07:15 (수)
낡은 악순환 대체할 새로운 주체를 바라며
낡은 악순환 대체할 새로운 주체를 바라며
  •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
  • 승인 2021.05.04 11: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 기고_ 『추월의 시대』 그리고 4.7재보궐 선거를 보고②

한국인은 누구이고 한국사회는 어떤 곳인가. 교수신문은 이 집요하고 오래된 물음에 대한 최신의 응답인 『추월의 시대』(메디치미디어, 2020)의 독후감을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국어국문학과)에 요청했었다. 선거의 계절을 거치면서 이 글은 본래 분량을 아득히 뛰어넘은 ‘한국사회의 조감도’가 돼 돌아왔다. 한국인의 자기서사 목록 맨 뒷줄에 반론 같은 보론이자 보론 같은 반론으로 놓일 천 교수의 글을 2주에 걸쳐 내보인다. 지난 회에서 “민주화(세력)와 산업화(세력) 간 대립”이라는 전제의 공허함을 짚으며 “현 집권 세력은 과연 ‘민주화’라는 가치를 대변하는가”라고 물었던 천 교수는 이번 글에서 “‘국뽕’의 자부심과 ‘헬조선’의 고통이 함께 공유하는 한국사회의 폭력적 경쟁구조”를 지적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7년,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이후 4년, '헬조선'에서는 무엇인 바뀌었나. 사진=연합
세월호 참사 이후 7년,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이후 4년, '헬조선'에서는 무엇인 바뀌었나. 사진=연합

 

 

K와 k에 대하여: 『추월의 시대』에 부쳐

‘선진국-후진국’과 GDP중심주의를 넘어서

 

오늘날 진영정치의 ‘악무한(惡無限)’은 한편 극렬 지지자들을 전위부대로 삼고, 다른 한편 ‘민주 대 반민주’라든가 ‘친일 대 반일’ 같은 표상에 기댄다. 진영정치는 일종의 감정정치며 비틀린 도덕정치라서, 다른 진영에 속한 자들과 그들의 당파가 가진 합리성과 공동체에 대한 진정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식 자체에서 배제하려 한다. 타 진영은 거짓말쟁이며 악의 화신이기에 타협과 대화의 대상이 아닌 절멸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런 기획은 ‘여야 협치’와 의회주의와 모순을 일으키기에 그들 자신의 무능으로 귀결된다. 물론 한국 보수의 주요 분파는 여전히 냉전 이데올로기와 지역주의 같은 것으로 먹고 살며 그들은 ‘친노’ ‘친문’의 정치를 증오나 공포로 받아들이고, 또 다른 일부는 일베처럼 참담하고 비루한 조롱으로 대응해왔다. 하지만 적대하는 진영이 서로를 닮고 끝없는 악순환과 무능에 귀착되는 책임은 결국 현재 집권하는 측이 져야 한다. ‘남탓’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양자의 ‘적대’는 소선구제, 대통령중심제 등 제로섬게임식 정치제도에 의해 보증되는 측면이 있다. 뺏고 뺏기며 정치보복도 불사하는 이 흥미롭고 위태로운 정치게임의 속내는 ‘이념 대결’이 아니라 ‘감정대립’이다. 능력주의와 신자유주의 앞에서 양자의 이념은 비슷하게 공허하고 부실한데, 정동만은 너무 강하다.

요컨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20세기 근대화 프로젝트의 역사적 의미를 정확히 평가하되, 지난 한 세대의 신자유주의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변형시킨 강력한 힘과, 2000년대 이후의 변화를 더 중시하여 재평가∙재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는 오래된 버전의 ‘산업’과 그 ‘민주’의 패러다임 시대에 개발된 ‘선진’ ‘후진’의 위상학, GDP 중심주의, 1987년판 민주주의는 더 이상 세계를 해석하는 의미 있는 척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필요하다면 다른 척도를 도입하고 사유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누군가 타자를 ‘추월’한다면 그게 오히려 ‘추월’의 의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추월의 시대』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아니면 ‘추월’을 외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타자의 거울 앞에 서 있는 유아일 것이다.

 

 

K와 k는 한 몸에서 나왔다

 

이 나라는 경제력, 군사력, 소프트파워, (형식적)민주주의의 측면에서 분명 큰 성취가 있다. 그러나 화려한 번영의 엷은 외피 아래에는 ‘글로벌 스탠다드’나 도저히 ‘선진’이라 부를 수 없는 다차원의 혐오와 차별, 그리고 지속불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선진적’이고 자부심을 가질만한(‘국뽕’) 한국(K)과, 부패하고 삭막하여 사람이 살기 힘든 ‘헬조선’으로서의 한국(k)은 병치돼 있다.

객관적 ‘k-지표’는 많지만, 부동의 자살률 1위, 출생률 (뒤에서) 1위만으로도 K와 ‘국뽕’ 전체를 무색하게 만들 수 있다. 이 지표들은 상위계층만 제외하고 다수 사회 구성원들의 삶이 전 생애주기에 걸쳐 힘겹다는 증거다. 남자건 여자건 아이를 낳기 두려워하고, 아이들은 청소년 시기부터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3포’ ‘5포’의 벽은 더 높아져 지속불가능성의 토대가 된다. k가부장제의 역설도 중단되지 않아 50대 이후 남성의 자살률 또한 끔찍하게 높다. 우울증, 공황장애 같은 정신질환 유병률은 젊은 여성층에서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

몇 년 전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는 한국을 방문하고 난 뒤 낸 책 『죽음의 스펙터클』에서 한국사회의 특징 네 가지를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 생활 리듬의 초가속화”라 추론했다. 가해와 자해의 스펙터클이 가족, 학교, 학원, 회사, 미디어 안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를 바꾸고 속도를 멈추거나 늦추어야 자살도 혐오도 줄이지 않을까?

 

 

문제는 K와 k가 서로 다르지 않은 한 몸이자 필요충분형 관계에 있어서, 폭력성과 잔인함이 (사실은 여전히 필요할지 모르는) ‘추격’과 동시에 ‘추월’의 동력인 상황은 앞으로 지속될 거라는 데 있다. 예컨대 K팝의 세계적인 선전은, ‘선진국’에는 없는 10대들의 피나는 경쟁과 그 노동∙신체에 대한 정밀한 착취를, K인재들의 뛰어난 학력과 성취는 학교폭력∙학벌체제, 그리고 높은 정신질환 유병률을 대가로 한 것이다.

이 같은 K와 k의 병치는 한국인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다. 책의 저자들도 말했듯, 멈추면 죽을까 싶어 죽도록 달려왔고, 와중에 실제로 많이 죽고 죽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전히 한국의 지배계급과 통치 엘리트들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 증거는 지난 4년 간의 일들이다. 최근에도 ‘촛불혁명’ 타령을 해댄 문재인 정권은 ‘혁명’은커녕 불평등과 지배체제를 더 공고히 해놓았다. 코로나 이후의 경기의 K자 전개는 실로 위태롭다. 수없이 많은 20~30대가 코인과 주식 투기판에 뛰어들게 했다. 문재인 정부식의 변죽만 울리는 정책들로는 자살률∙출생률 같은 지표도 나아질 수 없다. 문재인 정부나 국민의힘은 교육∙부동산∙지역 불평등을 고칠 의지나 철학이 없다는 점에서 거의 일치한다. k 속에 속한 이들이 좁은 관문을 진입하거나 또는 계층지위를 유지하려 엄청나게 비싼 사교육비와 부동산 대출금 따위를 치르고 경쟁과 능력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몸 속 깊이 체화하고 유지하는 것은 이중적이다. 이는 ‘공정’을 향한 대중의 식지 않는 분노와 불만의 연료이지만, 동시에 ‘구조’를 못 건드리는 한 지배와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에 맞는다.

 

‘현명한 낙관’이 필요한 이들은 누구인가

 

이런 진단은 비관인가? 낙관인가? 낙관도 비관도 아닌 그저 사실을 나열한 것일 테다. 그런데 『추월의 시대』는 ‘현명한 낙관’과 ‘단순한 비관’을 잘라 대비시켜 놓았다. 에필로그에서 힘주어 낙관을 말하고 ‘비관론’(자)이라는 것을 비판하고 있으나, 적어도 이 대목은 그냥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들렸다.

이 책이 수용되는 맥락을 상기해보고 싶다. 김경수 도지사가 길고도 진지한 추천사를 써준 일과 이낙연 민주당 전 대표가 크게 책을 칭찬한 것이 징후적이다. 청와대에까지 이 책이 들어갔다고 들었다. 아마 정권 말기라는 시점에서 새로운 비전을 담을 긍정적인 언어가 특히 여당과 정치인들에게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과연 그들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할 수 있을까?

전형적 ‘후진국형 사건’이라던 세월호 참사로부터 이제 7년, 그리고 심각한 위기론을 말했던 『축적의 시간』과 20~30대 남녀들이 ‘헬조선’을 떠나고 싶어한다는 『한국이 싫어서』 같은 책이 나온 지 6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이런 낙관의 구호를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지난달 16일 세월호 7주기를 맞아 진도 팽목항을 찾은 시민들. 사진=연합
지난달 16일 세월호 7주기를 맞아 진도 팽목항을 찾은 시민들. 사진=연합

 

모호하지만 지금 당장 확실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그 사이 소위 ‘촛불혁명’이 일어나고 그 기운에 엄청난 기대를 받으며 새 정부가 출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문 정권은 철학∙정책∙리더십∙전략 모든 면에서 부실하여 이 사회를 바꾸지 못하고(또는 더 나쁘게 하고) 큰 위기에 빠져있다. 이는 단지 그들 분파의 위기가 아니라 전체 한국사회의 위기로 연결될 수 있기에 문제다.

둘째, 그래도 와중에 평범한 시민들과 새로운 세대는 촛불을 통해, 또 선거를 통해 분투하며 뭔가 하려 했다.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다. 이런 열심과 노력은 비관의 산물도 낙관의 소산도 아닐 것이다. ‘비관’과 ‘비판’은 다른 것인데 영민한 저자들이 구분하지 못한(않은) 점은 이상했다. 정부나 체제를 비판해왔던 사람들조차도 언제나 열심히 뭔가를 해왔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듯하다.

 

절실한 혁신과 제3, 제4의 섹터

 

낙관과 ‘추월’의 담론이 결국 누구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말하는 것인가? 책의 저자들은 자신들이 80년대생이자 30대라는 것을 표나게 내세운다. 이 책의 약점의 상당부분은 세대론(저자들은 세대론이 아니라했지만 세대의 인식틀은 책에서 가장 중축으로 작동한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좋은 일이다.

이제 586과 조중동의 목소리 대신, 지금부터 사회의 책임 있는 자리로 갈 새 세대의 목소리가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대가 쓴 총론적 정치 담론이란 점에서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고 보인다.

 

사진=연합
사진=연합

 

이번 4.7 보궐선거에서 존재감을 한껏 드러냈다는 20대들이, 그리고 저자들의 동년배 여성들이 이 책의 담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도 궁금해진다. 4.7 보선의 승패가 ‘산업화 세대’ 대 ‘민주화 세대’의 대결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라, 586을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과 내로남불 강남좌파들에 대한 심판이었다는 점은 차라리 희망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구래의 대립구도나 그 내포가 이미 변해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이 더 많은 세대 간 토론은 물론, 새롭고 단단한 계층 및 세대의식의 주체들이 등장하는 데 하나의 재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말 이제 낡은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를 대체하는 30~40대와 혁신가들이 절실하지 않은가. 그들이 민주당과 국힘의 썩은 밭으로부터 일어서서 또는 그 바깥에서 대중의 분노와 현재적 대안을 ‘정치’로서 조직하는 것만이 ‘낙관’을 향한 길이라 생각한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근대의 책읽기』, 『자살론』, 『대중지성의 시대』, 『촛불 이후, K-민주주의와 문화정치』, 『1970, 박정희 모더니즘』(공저) 등의 책을 썼다. 민교협, 지식공유연대, 인문학협동조합 회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