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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진단_한국영화의 우울한 현실_④대안은 무엇인가
기획진단_한국영화의 우울한 현실_④대안은 무엇인가
  • 김경욱 세종대
  • 승인 2004.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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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품 아닌 '인재' 키워야...문자에 바탕한 영상 필요

▲부산영화제가 축제를 이루고 있다. 이 흥행이 과연 얼마만큼 지속될 수 있을까. ©

 

‘한국영화의 우울한 현실’이라는 교수신문의 기획기사를 읽으면서 부산영화제에 갔다. 언제나처럼 관객들은 넘쳐나고 노숙을 해서라도 보고 싶은 영화표를 구하려는 열혈영화광들도 적지 않았다. 매진행렬은 계속되고, 극장 안에는 어떤 흥분이 감돌고,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는 열띤 질문이 쏟아진다. 부산영화제에 참석한 외국감독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렇게 열성적인 관객을 만나게 되어 너무 기쁘다. 한국영화인들이 정말 부럽다”였다. 한국영화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관객점유율 50%를 넘나들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그들은 더욱 부러워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영화의 현실이 우울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올해 마스터클래스와 신작 ‘뤼미에르 카페’의 상영으로 부산을 찾아온 후 샤오시엔 감독은 객석이 꽉 차서 계단에 앉아 자신의 영화를 보아야 했을 정도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더 이상 ‘기쁘다’거나 ‘반갑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2001년 부산영화제에서 매진 상영된 ‘밀레니엄 맘보’가 작년 극장 개봉에서 전’적으로 2천7백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놀랍게도 이건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일반화되고 있는 현상이다. 이 기이한 현상을 시네마테크 관계자는 단순 명쾌하게 설명한다. “서울의 예술영화관객 수는 전부 합해서 5백20명 정도다.” 그러니까 아무리 부풀려도 전국적으로 2천명 남짓한 관객만이 소위 ‘예술’하는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다는 얘기다. 문제는 그 많은 관객들이 일편단심 대중영화만 찾는 가운데 영화라는 매체가 상품으로만 기능하게 된다면, 한국영화의 다양성과 깊이는 점점 사라지고 활력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대중영화의 중심 할리우드가 감독들의 다양한 재능을 흡수함으로써 끊임없이 새로워져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독특한 컬트 감독으로 널리 알려진 피터 잭슨이 계속 영화를 찍을 수 있었기에 ‘반지의 제왕’ 같은 대대적인 흥행성공작도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 비주류 관객층이 너무나 협소한 한국영화의 현실에서 감독이 내공을 쌓고 재능을 키울 여유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재능 가운데 특히 흥행감각이 엿보일 경우 감독 데뷔의 기회는 비교적 쉽게 주어지지만, 그가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를 찍을 확률은 매우 적다. 연출부로 일해 봐야 연출수업도 잘 안되고 생계마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감독지망생들은 소모품으로 끝장난다고 해도 준비여부에 관계없이 일단 감독이 되고 보자는 식으로 덤빌 수밖에 없다. 감독의 역량은 축적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다만 소모되고, 그러면서 중견감독도 원로감독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구조는 점점 더 강화되어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최근 대부분의 한국영화는 신인감독이 연출한 결과물이며, 관객들은 상품성에 홀려 설익은 미숙한 영화를 소비하고 있다. 사람을 키운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고 인간의 재능을 철저하게 소모품으로 이용하고 착취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 된다고 믿었던 한국사회의 경험이 여기 영화현장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잘 나가는 한국영화에 이 같은 악순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건 매우 불행한 일이다. 그런데 평론가로서 한국영화가 결정적으로 우울한 이유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은 모든 요소들까지 전부 감안한다 해도 못 찍은 영화, 기본도 없고 깊이도 없는 영화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준비가 전혀 안된 이들이 겁 없이 감독으로 나설 수 있는 이유는 태어나면서부터 영상매체를 접해온 이른바 ‘영상세대’이니 하여튼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누구나 글을 쓸 수는 있지만 전부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처럼,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는 있지만 전부 감독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상세대가 보았다는 그 영상은 대부분 텔레비전 화면이며 주로 드라마일 터인데, 거기서 펼쳐지는 영상이란 대사에 덧붙여진 장식의 기능으로 전락한 경우가 지나치게 많다. 화면을 안 봐도 내용을 훤히 알 수 있는 드라마(여기에 덧붙여 인터넷에 떠도는 동영상들)를 본 경험만으로, 그리하여 일종의 映像盲인 상태에서 좋은 영화를 찍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마스터클래스에서 후 샤오시엔은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으며 그것이 영화를 생각하는 하나의 힘이 되어왔다”라고 말했다. 임권택이나 왕가위 같은 다른 많은 훌륭한 감독들의 인터뷰에서도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불행하게도 개인뿐만 아니라 공적 부문에서까지 인터넷과 핸드폰을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얄팍한 한국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독서는 마치 옛 시대의 유물처럼 멀어져가고 있다. 고전영화는 지루해서 안보고, 책은 영화에 방해된다고 읽지 않고, 준비도 연습도 없이 무조건 찍으면 된다고 믿는 것이 한국 영화지망생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라면, 그럼에도 한국영화는 질적으로 도약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의 실마리를 여전히 찾지 못했으니, 근심스럽다.

김경욱 / 세종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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