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21:30 (금)
추모 : 자크 데리다라는 ‘유령’의 죽음
추모 : 자크 데리다라는 ‘유령’의 죽음
  • 진태원 서울대
  • 승인 2004.10.0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형이상학의 해체에서 타자에 대한 환대로

진태원 / 서울대 철학

자크 데리다가 10월 8일 파리에서 암으로 사망했다는 국내외의 신문보도를 접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그가 언제 살아 있었던 적이 있었는가. 그는 늘, 적어도 우리에게는, 유령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던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는 유령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이는 매우 당혹스러운, 거의 모순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죽음은 유령의 죽음, 결코 살아 있는 존재인 적이 없었던 한 유령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 죽음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니, 이 죽음이 하나의 사건이기는 한 것일까.

사실 유령이라는 주제는 그의 초기 저작부터 일관되게 지속된 주제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초기) 데리다에게 서양의 철학사는 현전의 형이상학의 역사다. 생생한 현재 속에서 사태의 의미가 충만하게 의식에 드러날 때, 또는 적어도 그 가능성이 원칙적으로 전제될 때, 비로소 진리로서의 로고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현전의 형이상학의 원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반박하는 대신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그것은 자신의 타자, 자신의 근원적 한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데, 이 타자는 바로(‘글쓰기’라고 다소 부적절하게 번역되곤 하는) 에크리튀르(ecriture), 곧 기록이다. 실제로 서양 형이상학은 플라톤에서 소쉬르,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생생한 현재, 주체들끼리 주고받는 음성적 대화를 특권화하면서 기록을 하찮은 것으로 매도해왔지만, 기록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기술적 토대였으며, 따라서 기록은 현전의 형이상학의 유령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에 따르면 모든 기록은 항상 ‘나’라고 말하는 주체의 부재, 주체의 죽음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곧 내가 어떤 것을 쓸 때, 내가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무언가를 기록할 때, 나는 항상 부재하는 나를 대신해서 나의 생각, 나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대체보충’의 장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기록하는 순간, 원칙적으로 나는 이미 나의 부재의 가능성, 나 자신의 유령화의 가능성을 기록 안에 구현하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주체는 항상 자신의 유령 속에서, 또는 유령으로서 실존하는 것이다.

  1980년대 말 이후 이 유령에 대해 해체 불가능한 정의라는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데리다는 윤리ㆍ정치적인 주제로 유령론을 확대했다. 유령은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현전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현전의 형이상학의 범주들을 초과할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에게,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자들에게 불의를 바로 잡고 정의를 실행할 것을 명령하는 타자들의 모습으로 출몰한다. 데리다에게 이 타자들은 이주노동자들, 인종차별과 종교적 박해의 피해자들, 사형수들 및 그 외 많은 ‘약자들’과 다르지 않은데, 그는 이러한 타자의 부름, 정의에 대한 호소에 응답하고 환대하는 일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윤리적ㆍ정치적 책임이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데리다는 또 다른 유령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원조라는 환영으로 기억되고 있다. 1980년대 말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남긴 외상을 치유하기 위해, 또는 오히려 은폐하기 위해 홀연히 등장한 실체 없는 허깨비라는 것이다. 사실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데리다는 경탄과 찬양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불신과 의혹의 대상이기도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때로는 경박한 유희꾼으로, 또 때로는 유사파시스트로 그를 의심했고, 좌파 쪽 사람들은 우유부단한 자유주의의 변호론자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이를 요약하는 명칭이 다름 아닌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하지만 자기미화나 자기변호에 서툴렀던 그가 결연히 반대한 호칭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점에서, 이 모든 비판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실제로 이런 류의 비판들은 이러저러한 이데올로기적 알리바이로 봉사해왔을 뿐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하나의 사건은 오직 수행적 행위를 통해서만, 기존의 관습, 기존의 제도를 초과하는 "도착적인 수행적 행위"(perverformatif)의 위험을 무릅쓸 경우에만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위험은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행위, 따라서 모든 결정(decision)에 깃들어 있으며, 타자들에 대한 환대, 타자들의 부름에 대한 절대적 호응만이 결정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엊그제 전해진 그의 부음은 실은 아직 하나의 사건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데리다라는 유령을 환대한 적이 없고, 그를 사로잡고 있는 그의 유령들의 부름에 귀 기울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이라는 사건, 아마도 결코 현재화하지 않을 그 사건은 장래의 사건으로, 도래할 사건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사건을 사건화해야 하는 과제,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애도의 과제, 환대의 법칙이 명령하는 무한한 책임의 과제일 것이다.

필자는 연세대에서 '스피노자의 일반계보학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들뢰즈: 인간과 사상', '차이에서 유령론으로' 등의 논문이, '법의 힘'(데리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마슈레) 등의 역서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