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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과 대결하는 삶과 앎의 투명한 긴장
근대성과 대결하는 삶과 앎의 투명한 긴장
  • 교수신문
  • 승인 2001.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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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03 17:14:54
앎과 삶의 背離 비판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다. 물론, 새롭지 않기 때문에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비판이 당위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의 세계를 품고 있어야 한다. 혹은 하나의 세계를 향한 나침반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근대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서구의 현재 時刻을 따라가고자 하는 앎과, 그 앎에서 언제나 뒤떨어진 채 존재하는 삶 사이의 풀어진 긴장은 ‘근대의 보편성’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되는데, 그 근저를 뒤흔들 가능성은 기원으로서의 근대에서부터 발원하기 때문이다.

‘근대의 밖’ 또는 환유의 가로지름

구모룡 한국해양대 교수의 ‘제유의 시학’(좋은날 刊), 김인환 고려대 교수의 ‘기억의 계단’(민음사 刊), 황종연 동국대 교수의 ‘비루한 것의 카니발’(문학동네 刊)이 만나고 갈리는 지점은 바로 근대성 위이다. 그간 문학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론, 근대/탈근대론, 동아시아론, 생태학이 관심을 끌어왔음을 염두에 둔다면 근대성이란 교차점은 충분히 수긍된다. 따라서 이들의 평론집을 통해서 근대성 논의에 대한 문학적 대응의 양상을 가늠할 수 있다.

‘제유의 시학’이 흥미를 끄는 부분은 ‘미적 근대성’에 대해 ‘포위된 혁명’이라 비판하는 부분이다. 주지하다시피, 미적 근대성은 근대 사회를 부정하면서 미학적 차원에서는 근대를 인정한다. 이러한 이중성으로 인해 “그 동안 시적 근대성은 식민지 근대에 포획되었고 다시 자본과 기술에 가두어졌다. 따라서 시적 혁명은 처음부터 포위되어 마침내 수동적 혁명으로 전락한다”고 구모룡 교수는 파악한다. 여기서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제유의 시학’이다.

구교수가 파악하기에 제유는 근대적인 논리인 은유와 환유를 가로지른다. 왜 은유와 환유가 문제인가. 은유는 대상과 대상을 강제로 연결한다. 주체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 등 모든 중심주의는 은유적 욕망과 다르지 않다. 환유는 부분들의 외재적인 관계만을 중시한다는 데 한계가 있다. 외재적 관계는 근대적인 관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반면, 제유의 시학은 원초적인 상호 교감의 체계인 ‘類比’를 사유와 수사의 원리로 삼는다. 즉, 제유는 대상과 전체의 관계에서 통합적으로 표현된 내재성에 관한 어법이므로 생명시학으로 이어져 근대의 비생명적 ‘기술시학’과 대립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구교수의 야심찬 기획의 성패는 제유시학이 바탕으로 하는 ‘근대의 밖’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가에 달린 듯싶다. 예컨대 “제유시학은 근대 속에서 근대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학의 차원에서 이것이 근대 부정을 통하여 이끌어 내고자 한 것이 미적 근대성에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을 보자. 유기론의 제유적 인식을 펼쳤던 김동리의 세계와 구교수의 시도는 어떻게 변별성을 확보하고 있는가. 단지 마르크시즘이 반대편에 존재했기 때문에 김동리의 제유적 인식이 체제 옹호의 이데올로기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일까. ‘근대의 밖’이란 제유의 시학이 여전히 근대적 원리 속에서 작동하는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을 이를 터, 김동리가 이르지 못한 역사적 질감이나 ‘포위망을 뚫는 혁명’의 가능성은 여기서부터 출구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김인환 교수의 ‘기억의 계단’에 실린 글들은 대체로 두 개의 극점을 설정하고 펼쳐진다. 예컨대 ‘한국문학과 기술이데올로기’에는 조선말 ‘무력한 평화주의’와 ‘일본과의 전쟁 전개’가 봉긋 솟아있으며, ‘한국현대소설의 계보’에서는 신채호와 이광수, ‘재즈와 요가’에서는 장정일과 박상륭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두 개의 극점 사이를 메우는 것은 사회학·경제학·한문학·역사학·불교 경전, 수학을 넘나드는 방대한 지식이다. 이에 따라 문학은 근대의 구체적 전개 과정의 두 극점 사이에 펼쳐지게 되며, 특수와 보편의 변증법은 어긋남의 기억 속에서 실감을 획득한다. 김교수는 이를 한국 현대문학의 단계론(stages-theory)이라고 부른다.

“문학작품에서 우리는 세계의 같음과 다름과 어긋남을 체험한다. 문학의 단계론은 기억의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밟아 내려가면서 서로 상충되는 이질적 원리들이 하나의 문학 시대에 내재하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의 이해가 자리잡는 곳에 이해되어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조선 전기 官人文學에서 시작하여 ‘통일시대의 사회와 문학’, ‘동아시아 문화 연구의 반성과 전망’에까지 이르는 내적 완결성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저자가 확보한 시선의 독특함은 독파하는 내내 시종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도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김동리 소설의 계보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김동리가 ‘근대 超克’ 논의와 관련하여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좌표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때, 근대성 논의에서 그의 빈자리는 크게 다가온다.

‘비루한 것의 카니발’에서 황종연 교수 나름의 독특한 근대 정립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체로 90년대 소설평으로 넘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근대성’을 둘러싼 입장은 5부에 묶인 네 편의 글로 한정된다. 90년대 초중반 황교수가 발표한 ‘모더니즘의 망령을 찾아서’, ‘근대성을 둘러싼 모험’, ‘反近代의 정신’이 불러일으켰던 관심을 염두에 둔다면 의외라고 하겠다. 왜 이런 결과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왜 비평행위인가

아마도 논의 과정에서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샬 버먼의 ‘근대성의 경험’을 소개하고, 서영채·이광호의 근대에 대한 입장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때 그의 안목은 빛을 발한다. “일반적인 근대, 그런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단정하며 이태준의 반근대를 검토할 때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근대성과의 싸움이 어느덧 불임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라는 그의 주장은 힘없이 다가온다. 그 싸움에서 치열한 피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은 필자의 우둔 때문일까.
홍기돈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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