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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서평 : <참여와 연대로 연 민주주의의 새 지평>(참여연대 지음, 아르케 간, 2004)
논쟁서평 : <참여와 연대로 연 민주주의의 새 지평>(참여연대 지음, 아르케 간, 2004)
  • 하승우 경희대
  • 승인 2004.10.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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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론적 고민에 그쳐…내부소통구조 혁신 필요

하승우 / 경희대·정치학

참여연대는 '진보적' 시민운동을 표방하며 출범했고 실제로 한국사회의 발전에 많은 몫을 담당해 왔다. 출범 10년을 맞아 참여연대가 묶은 '참여와 연대로 연 민주주의의 새 지평'(아르케 刊)은 그 동안 걸어온 길에 대한 평가와 함께 나아갈 길에 대한 전망을 밝히고 있다.

정치권력에 대한 감시운동, 사법개혁운동, 국민생활최저선 확보운동, 소액주주운동, 기업지배구조개선운동, 작은권리찾기운동 등 참여연대가 정치, 경제, 사회의 각 분야에서 일궈 온 업적들은 극찬을 받아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이슈파이팅을 중심활동으로 삼는 시민운동은 자신의 성과가 누적될수록, 즉 개혁이 이뤄질수록 운동의 사회적 입지가 줄어드는 '역설'을 갖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노무현 정부의 출범, 특히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이라는 변화된 정치지형은 그 역설이 실현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즉 시민들의 요구가 제도정치를 통해 수용될 가능성이 커지는 만큼 시민단체가 싸울 이슈는 줄어들기에, 단체의 장기적인 존립은 위태로워진다. 그래서인지 책의 상당 부분은 새로운 전망을 찾기 위한 고민들로 채워져 있다. 포괄적인 국가비전의 정립, 지구적·지역적 연대 강화, 새로운 운동형식의 개발 등은 그런 고민들을 반영한다.

과거 참여연대의 운동논리가 '선택과 집중'이었다면, 새로운 고민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건 조희연(성공회대 교수)이 주장한 시민운동적 실천의 '심화'와 '확장'일 것이다. 그런데 운동의 전문성을 높이는 심화와 생활세계이슈, 글로벌이슈로의 확장을 동시에 추구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고 오히려 단체의 과부하를 불러올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참여연대가 풀어야 할 당면과제일까 라는 의문도 든다. 앞으로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금 더 근본적으로 과거를 반성하면 어떨까.

때론 앞선 경험이 좋은 시사점을 주기도 한다. 참여연대보다 5년 앞서 출범한 경실련 역시 이슈파이팅을 주로 하는 '대변형' 시민운동단체다. 경실련과 참여연대는 출범 당시의 구성원과 이념적 지향 면에서 차이를 드러냈지만 사무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조직구성의 측면에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하승창 함께하는시민행동 사무처장은 'NGO 이야기'(아르케 刊, 2001)에서 경실련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시민운동에 몇 가지 제언을 하고 있다. 활용이 아니라 언론에 의존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 풀뿌리 지역자치조직의 활성화, 사업과 상근 규모의 축소, 사회적 영향력에 기댄 오만과 독선에 대한 경계도 의미가 있지만 일단 조직구성의 측면만 보자. 하승창은 초기의 의사결정구조나 조직운영방식이 민주적이라 해도 그 규모가 커질수록 집중성을 가지게 돼 자연스럽게 구성원의 소외와 민주적 토론을 봉쇄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결국 이는 "의사결정의 주요 라인에 있는 사람들에게 결정과 토론이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조직운영과 소통 면에서 참여연대는 이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까.

책에서 한준(연세대 교수)은 참여연대 정책의 이념적 지향이 진보적이라고 답한 비율이 임원의 경우 77.4%, 상근자의 경우 57.2%로, 둘 사이에 20.2%라는 격차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자신의 이념성향을 진보적이라고 보는 임원과 상근자가 80.6%와 76.2%로 그리 큰 격차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의 '징후'를 드러낸다. 한준은 이 격차를 분석하지 않고 언급만 하고 지나가지만, 이념적 지향이라는 근본적인 차이는 내부의 소통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평간사협의회가 2000년도에 구성됐음에도 이런 격차를 보이는 건 단순히 회의의 구성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임을 증명하는 듯하다.

그리고 참여연대는 외부의 지원 없이 회비로 운영될 만큼 자립적인 재정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회원이 많다는 점이 그 조직의 참여지향을 자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이선미(한양대 연구교수)는 지역공동체활동에 미치는 시민운동단체 소속의 영향을 실증적으로 분석하면서 "권익주창중심적 시민운동단체는 지역활동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결과를 도출했다('시민사회와 NGO' 2004년 봄·여름호). 이는 참여민주주의의 참뜻인 참여를 통한 교육과 주체의 역량강화(empowerment)가 회원 차원에서 이뤄지지 않고 단순히 회비납부와 이슈파이팅을 통한 대리만족에 그치고 있음을 증명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런 활동은 어렵게 제도를 개혁해도 정작 그 제도를 운용할 주체가 없는 '참여의 역설'을 낳게 될 것이다.

또 '연대'의 측면에서도 문제가 드러난다. 한국에서 대형시민단체를 제외한 다른 시민단체들은 자신들을 '등 단체'라고 규정한다. 같이 노력하고 준비해도 언론은 대형시민단체 등 몇 개 단체라고만 보도하기 때문이다(홍일표에 따르면, 언론을 대상으로 한 참여연대의 활동은 "전체의 61%, 약 2/3에 가까운 비율"을 차지한다). 언론에의 접근도는 사회적인 인지도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결국 전문가와 회원이 대형시민단체로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게다가 대형시민단체들은 광고까지 한다). 자연히 다른 시민단체들의 재정은 어려워지고 활동은 제약을 받게 된다. 다른 단체들이 연대를 요구하기에 어쩔 수 없다는 '변명' 이전에 왜 그런 구조가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성찰은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다. 참여의 내실화를 위한 노력과 새로운 연대구조의 마련은 참여연대를 더 튼튼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제도개혁이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지금 당장 이슈파이팅을 중단하라는 얘기도 아니다. 다만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내부에서부터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 진정 '참여' '연대'이고자 한다면, 이런 변화는 운동의 심화나 확장만큼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참여와 연대로 연 민주주의의 새 지평'이 보여준 반성은 당위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은 이런 말을 남겼다. "민중은 알고 싶어한다.…그들은 기회와 방법과 시간만 주어진다면 자신의 지식을 확장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말로만 인류의 진보를 역설하는 진보주의자들, 농민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체 하면서 실은 농민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은 단지 자신의 모순을 감추는데 급급하여 궤변만 늘어놓고 있었다." 지금 우리의 시민운동도 한번 고민해야 할 말이 아닐까.

필자는 고려대에서 '마르쿠제의 모더니티 비판'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와 협의 정치의 가능성', '아나키즘의 현대적 재해석' 등의 논문이, '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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