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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느리고 희망은 강렬하다"
"삶은 느리고 희망은 강렬하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10.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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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산책 : 『검은 비너스 흰 비너스』(이가림 지음, 문학수첩 간, 2004)

가을볕 속은 이중적이다. 빛의 따뜻함과 바람의 차가움이 만나는 곳에서 설레임과 무기력은 교차한다. 정오의 테라스에서 펼쳐든 책은 낭만주의 시인들을 불러낸다. 미라보 다리의 기욤 아폴리네르, 미치광이 폴 베를렌느, 변덕스러운 뮈세와 음울한 보들레르, 그리고 불쌍한 떠돌이 네르발…. 동서를 막론하고 낭만주의는 病과 퇴폐, 그중에서도 결핵에 걸려 터져나오는 격렬한 기침을 연상케 한다.

낡은 하숙집의 침대에 누워 피워 문 '하시시'(보들레르가 즐겨 피운 대마초와 비슷한 담배)가 손끝을 따갑게 파고들며 결핍감과 절망감을 서서히 가라앉히고 나면, 그 연기 뒤편으로 섬광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어떤 전율감. 보들레르의 눈빛은 이런 낙차 큰 삶을 그의 깊게 패인 눈 속으로 어둡게 점등시키고 있다. 하지만, 책 속에서 보들레르와 그의 친구들로부터 아름다운 운율을 불러낸 여인들은 햇빛 받은 흰 종이 위에서 반짝거린다.

이가림 인하대 교수(시인, 불문학)가 펴낸 ‘흰 비너스 검은 비너스’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의 시적 열정이 무엇으로 비롯되었는가에 대해서 부분적인 대답을 해준다. 그것은 세기말의 독감에 걸려 콜록거리던 청년들을 사로잡은 여인들의 실루엣이었다. 살롱의 부인부터, 여염집 처녀, 사촌누나와 사창가 여인까지 시인들이 찬사를 바친 뮤즈들이 시인의 삶의 과정 속에 등장했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저자는 복잡하고 긴 이 ‘애정의 여로’를 추적해 데카당스의 눈에 해당하는 낭만시에 드러난 과도한 감정과, 그 감정이 쏘아져나가는 방향과 대상, 속도감까지 되살리고 있다.

네르발은 가장 불행한 사나이다. 그는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었다. 우울한 사춘기를 지나 1836년 그의 나이 28세에 드디어 제니 콜롱이라는 배우를 만난다. “그녀는 내 모든 열정과 변덕스러움에 응답해 주었다”며 짝사랑에 미친 듯이 타오르던 네르발은 콜롱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자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그 5년 후에 자살한다. 파리의 새벽 거리에서 가로등에 목을 매단 것이다. 네르발에게 콜롱은 정말 특별한 여자였다. 사춘기의 여인들이 모두 콜롱 안에 있었고,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들었네. 누구인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 그건 죽음이었네! 그는 마지막 소네트에 마침표를 찍을 동안만 기다려 달라고 간청했네. / 마침내 넋이 빠져나가는 순간이 왔을 때, / 내가 왜 왔었나? 라고 말하며 그는 떠나갔네.”

네르발이 남긴 마지막 시다.

그에 비하면 다른 시인들은 고통스러운 행복 속에서 살다 갔다. 시인들은 여인들에게 너무나도 깊이 집착했고, 삶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갔다. 자유연애의 화신 ‘조르주 상드’와 사랑에 빠진 뮈세는 그녀의 맺고 끊는 다부진 생활태도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 상드는 낮과 밤을 뒤바꿔 생활하며, 영혼의 위안과 육체적 정점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자신과 일치시키길 요구하는 잘생긴 미남자의 투정을 들어줄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물찬제비처럼 여인들을 가볍게 디디고 살아왔던 뮈세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이 미적 소통의 단절이 난감스럽기 그지 없었다. ‘완만한 자살’이라 해도 좋을만한 술과 유흥에 젖어 밤에 기어 들어온 뮈세는 우유를 마시며 밤새도록 소설 반권을 써내려가는 상드의 닫혀진 집필실 앞에서 절규했다.

‘슬픔’에서 그는 “나는 힘과 생명을 잃어버렸네 / 친구와 쾌락도 / 나의 천재를 믿게 했던 / 자존심까지도 잃어버렸네! … / 이 세상에서 내게 남은 유일한 재산이란 / 때때로 울어 봤다는 것이라네!”라고 적는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식민지 태생의 흑인혼혈녀 잔느 뒤발을 가리킨다. 거짓말 잘하고, 방탕한 그녀는 보들레르를 수없이 배반했을 뿐더러 자신의 백수 남동생까지 떠맡긴채 떠나가지만, 보들레르는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잔느와는 정반대의 매혹을 풍긴 다른 정숙한 여인과의 플라토닉한 연애의 나날 속에서도 잔느는 보들레르라는 본능 속에서 잠시 가출한 여인으로 남아있었다. 결국엔 폐병과 알콜중독에 걸려 세상에서 반품돼 돌아와, 무일푼이었던 보들레르로 하여금 온갖 빚을 얻어 아파트를 전세내고, 며칠마다 들러 그녀를 간호하게끔 만들은 ‘무거운 납덩어리’ 같은 존재였지만 뒤발은 '검은고양이'를 비롯한 보들레르의 명작 시의 상징으로서 순화되어 보존됐다. “훈훈한 그대 젖가슴의 냄새, 바람에 흘러 내 코를 부풀리고, 내 영혼 속에서 뱃사공의 노랫소리와 뒤섞이네”에서 보듯 보들레르에게 ‘영원히 고독한 운명의 감정’에서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던 것이다.

여인을 만나러 가기 전에, 혹은 여인을 떠나보내고 난 후에 시인들은 재기발랄함의 과시로서, 만남의 약속을 받아내기 위한 필사적인 수사적 전략으로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이후의 상처를 핥아내는 조심스러운 종교의 언어로서 시를 써나갔다. 그렇게 19세기 프랑스의 여인들은 싯귀에 실려 오늘날까지 신비롭게 전해져오는 시들의 내재율로 기능하고 있다. 그 운율과, 그 운율이 표현하는 대상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발자크와 플로베르의 소설에서는 그토록 수다스럽고 구체적인 욕망의 존재였던 그녀들이 시인들에 의해 한 세기를 특징짓는 '애정의 이데아’로 영원히 남겨진 것이다. 그것은 슬픔에 젖어 더욱 길쭉해보이는 아폴리네르의 얼굴에 와닿은 물그림자처럼 어룽거린다.

“삶은 얼마나 느린 것인가 / 또 희망은 얼마나 강렬한 것인가 / 날이 가고 달이 가고 / 흘러간 시간도 / 사랑도 돌아오지 않는데 /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른다”(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에서).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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