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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구성물'이 아니다‥옹호·비판의 단순화 넘어야
과학은 '구성물'이 아니다‥옹호·비판의 단순화 넘어야
  • 이상욱 한양대
  • 승인 2004.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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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서평_'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홍성욱 지음, 문학과지성사 刊, 1999, 399쪽)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은 상당히 유명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간 후 단 두 번의 서평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 책이 처음 나와서부터 주목을 받았다기보다는 점차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알려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거기에 더해서 과학기술과 관련된 치밀한 논의가 점점 더 필요해지는 최근 현실에 비해 그런 논의를 담은 본격적인 연구서가 많지 않고 그런 책에 대한 우리 인문사회학계의 관심이 홍교수의 책이 나왔던 1999년에는 비교적 높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생산에서 문화로'의 시각은 잘못

기존의 두 서평에서 제시된 논점을 따라 책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드러내고자 한다. 출간 후 얼마 안돼 ‘중앙일보’(99년 11월 11일자)에 실린 과학사를 전공한 김기협 선생의 서평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독점행위에 대한 美 법원의 판결로 서두를 시작한다. 김기협 선생은 이 책이, 기술이 발전되는 과정이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그것의 산업화라는 단순한 도식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이미 개발된 기술이나 사회적으로 투자된 간접자본에 제한을 받는 맥락에서 이루어진다는 기술발전의 ‘경로의존성’을 분명하게 부각시켰다고 지적한다. 3벌식 타자기가 2벌식 타자기에 비해 더 효율적이라는 점이 ‘객관적’인 사용실험에서 아무리 자주 입증되어도 이미 2벌식 자판에 익숙한 사용자가 다수인 상황에서 3벌식 기술은 경쟁력이 없다는 사실이 이러한 ‘경로의존성’을 잘 보여준다. 김기협 선생이 보기에 홍 교수는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자신의 컴퓨터 운용체계에 웹브라우저를 통합시켜 한 묶음으로 파는 행위가 왜 경쟁업체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만들 수 있는지를 ‘경로의존성’의 개념으로 잘 설명했다고 평가한다. 전체적으로 이 서평은 홍교수의 책이 ‘경로의존성’과 같은 유용한 분석도구를 사용하여 과학기술이 오늘날 겪고 있는 급격한 위상변화의 여러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급격한 위상변화는 책의 제목과 연결시킬 수 있다. 즉 과거에는 생산력의 원천으로 간주되던 과학기술이 현재는 문화현상으로 그 위상을 재정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홍 교수가 현대 과학기술의 여러 다양한 측면들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생산력으로서의 과학기술에서 문화로서의 과학기술로 급격한 위상변화를 주장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책의 서문에 분명히 나와 있듯이 현대 과학기술이 생산력으로 기능하는 측면은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홍교수의 주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에는 생산력에 도움을 주는 기능만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사회문화적 기능이 존재하고, 그것이 문화현상으로서 과학에 대한 본격적인 인문학적 성찰이 필요한 이유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홍교수의 전반적 견해는 과학기술이 문화현상으로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는 과정 자체가 급격했다기보다는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이 이해되는 방식이 지나치게 생산력 위주였으므로 과학기술의 문화적 위상에 대한 연구와 인식이 시급하다는 지적으로 읽혀야 한다.

과학사회학자이자 시민과학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김환석 교수가 ‘문학과사회’(2000년 봄호)에 쓴 서평은 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김 교수는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을 비롯하여 90년대 말에 출간된, 과학기술을 좀 더 넓은 맥락에서 바라보는 내용을 담은 4권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우선 이 4권의 책 모두 21세기가 시작된다며 호들갑을 떨던 매스컴의 주요 화두였던 ‘적응하라, 아니면 도태될 것이다’에 대한 심각한 반론을 제기한다고 본다. 즉 과학기술 발전만이 살 길이라는 과학지상주의적 시각에 대해 페미니즘과 과학사회학의 새로운 흐름이 사회구성주의라는 체계화된 반론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과학기술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시각이 과학기술의 새로운 전개가능성을 비침으로써 기술의 필연적 발전경로를 가정하는 사회진화론적 시각이 허구임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에 대한 김 교수의 평가가 그것이 과학비판에 얼마나 본격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은 자연스럽다. 우선 김교수는 홍교수가 최근 과학기술사, 과학기술철학, 과학기술사회학의 중요한 쟁점을 ‘과학전쟁’, 급진과학운동, 토마스 쿤, 보일-홉스 논쟁, 과학과 기술의 상호작용, 여성과 기술, 몸과 기술, 인간 복제, 사이버 스페이스, 새로운 기술경제학 등의 광범위한 주제를 통해 논의했다는 점을 이 책의 장점으로 꼽는다. 그리고 그러한 다양한 주제를 소화해서 연구할 수 있는 저자의 학문적 깊이를 칭찬하지만, 정작 김 교수는 이런 다양한 주제에 대해 저자가 일관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의문을 표시한다. 이 책이 과학기술을 그다지 큰 문제가 없는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과학기술과 관련된 문제가 과학기술 자체가 아니라 과학에 대한 사회의 몰이해 혹은 사회에 대한 과학자들의 몰이해,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의사소통의 결여에 있는 것으로 독자에게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김 교수는 홍 교수가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보다는 화해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김교수의 시각은 기본적으로 과학기술을 극복해야 할 권력과 지식담론으로 상정하고 이를 적절히 통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사회운동이나 시민참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비판적 논의에 쏠려있다. 이 점은 김교수가 함께 논의하고 있는 다른 책, ‘진보의 패러독스’(당대 간, 1999)에 가장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지금은 ‘시민과학센터’로 이름이 바뀐 ‘참여연대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에서 엮은 책으로서 보다 실천적인 문제에 대해 과학기술을 민주화하고 과학기술정책에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둔 책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연구가 과학기술의 민주화나 과학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시민참여에 도움이 되는 이론적 무기를 제공하는 것에 그 존재의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김 교수는 마치 사회구성주의나 페미니즘이 과학기술의 민주화 운동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진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실제로 사회구성주의는 과학지식의 성격에 대한 철학적 문제제기에서 출발하였고 연구자들의 이념적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논의에서 과학기술의 사회적 적용뿐 아니라 내용에서조차 남성우월주의적 시각이 들어있다는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비평 계열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과학기술학 연구에서 페미니즘적 시각이 원용되는 경우에는 실제로 큰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 과학기술의 다양한 측면이 단순히 과학맹신적이라거나 권력지향적이라는 도식으로 간단하게 묶일 수 없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고, 과학기술이 발전해 온 양상 역시 사회진화론적 시각의 기술결정론이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서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학기술학이 보여주는 과학기술의 풍부한 역사적, 철학적 사례들은 과학기술의 ‘객관적’인 연구방식이 세계에 대해 절대적 참을 제공해주는 이상적 방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회적 이해관계에 의해 단순히 ‘구성’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작동하는 이런 복잡한 방식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과학을 옹호하는 사람이나 과학을 비판하는 사람 모두 과학을 단순화시켜 이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홍 교수의 논의는 이런 국내외의 상황에서 과학의 다양한 모습들과 그것의 함의를 과학기술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에 근거하여 차분하게 논의하고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즉 과학비판 사회운동의 담론으로서가 아니라 과학기술의 여러 측면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 성과물로서의 의의를 갖는 것이다. 홍 교수는 과학기술사를 전공했지만 과학기술철학과 과학기술사회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왔다. 이는 과학기술과 같은 복합적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택이 아니라 거의 필수적인 덕목일 수 있다. 그러므로 홍교수의 논의방향이 우리 학계에서 보다 생산적으로 음미되고 발전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에 대해 다양한 분석도구와 시각을 아우르는 학제적 접근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이상욱/한양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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