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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반론_김상봉 선생의 반론(교수신문 329호)에 답한다
재반론_김상봉 선생의 반론(교수신문 329호)에 답한다
  • 장은주 영산대
  • 승인 2004.10.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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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원과 속성부터 성찰해야

겸손과 학문적 단호함이 어우러진 김상봉 선생의 내 서평에 대한 답을 읽으면서 우선 나는 내가 다시 답을 해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산업의 농간”에 대한 저자의 우려에 나로서도 공감하는 부분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어쩌면 그와 같은 농간을 가능케 한 우리 사회의 어떤 문화?심리적 기제와 그리고 그 기제의 작동을 부추긴 저자의 문제인식의 관점에 대한 지적이 내 서평의 기본 논점이었다고 할 수 있기에, 나로서는 한 두 마디 쯤 더 해 두는 것이 김상봉 선생의 학문적 발전을 위해서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실용적 명명의 산물’이다

짧은 지면을 고려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저자의 깊은 문제의식을 놓치고 있지는 않았으며 다만 그 문제의식을 철학화하는 전략과 방식을 문제 삼고 싶었다. 이렇게 말해 보자. 왜 우리는 ‘우리’를 문제 삼으면서 꼭 그렇게 ‘서양이 아닌 우리’의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나는 문제를 이렇게 정리하면서 김상봉 선생의 ‘시도’를, 예컨대 목소리만 큰 어떤 ‘탈식민 담론’의 아류로 평가할 생각은 없다. 그의 시도는 연습 수준에서나마 이미 그런 수준을 뛰어넘고 있다. 그는 확실히 기지촌 지식인을 비판하는 조공국 지식인의 우스꽝스러움 따위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한 번도 타자적 정신에 의해 자신을 상실해 본 적이 없는 그들’과 본질적으로 ‘거울을 잃어버린 우리’의 대비에서 출발하는 그의 시도 역시, 니이체 식으로 말하자면, 여전히 어떤 ‘종속적’ 느낌을 주기는 매한가지가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우려의 핵심이다. 서양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주체성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의 배경을 나로서도 공감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는 과도한 서양의 타자화와 ‘우리’의 부추김은 어쩌면 그가 택한 전략의 불가피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게는 두 개의 나르시시즘 개념의 구분이 문제가 아니라, 김상봉 선생도 인정한 독자들의 반응에 숨겨진 나르시시즘을 부추긴 그의 기본적인 이론적 전략이 문제였다.

‘우리’를 어떻게 철학화할 수 있을까. 물론 한 가지의 올바른 방식만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적해 둬야 할 올바른 출발점은 있을 것 같다. 본질주의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실체화된 ‘우리’, 하나의 공통의 역사와 미래를 갖고 있는 거대주체 ‘우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많은 암묵적 가정들은 단순한 허구의 무비판적 신화화에 불과하다. 나는 ‘우리’를 이론화하려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인문학적 시도들이 이 함정을 피해가지 못하는 것 같아 늘 안타까웠다. ‘우리’는 ‘문제’이고 비로소 구성되어야 할 미래의 집합적 실천적 주체성에 대한 어떤 ‘은유’로 이해돼야지 그 자체로 역동화되고 주체화될 수 있는 실체가 돼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단지 특정한 집합적, 사회적 실천의 현실적 단위와 그 실천의 불가피하고 일차적인 시공간적 제약을 공유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실용적 명명의 산물일 뿐이다. 그 실용적 은유를 넘어서는 실체화된 ‘우리’의 이론화와 철학화는 적어도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내게는 너무 외설적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발견해야 할 어떤 비밀스러운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으며 대문자 ‘역사’가 있다고 믿는 것은 어떤 헤겔적 역사철학의 나쁜 유산에 전염된 탓일 뿐이리라.

‘우리’가 꿈꿔야 할 ‘자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본질적으로 미결정된, 과거에 대해서나 미래에 대해서나 해석학적 쟁투의 대상이고 기껏해야 어떤 새로운 기획의 조감도일 수는 있어도 처음부터 뚜렷한 윤곽을 갖춘 내실적 존재가 아니다. 바로 그래서 ‘우리’의 올바른 방식이 문제다. 김상봉 선생은 자신이 오랫동안 다듬어 왔던 서로주체성이란 개념을 내가 마음씨 좋게 그저 헤겔에게 선물하고 말았다고 지적했지만, 나로서는 그 올바른 방식에 대한 문제설정 없는 그의 서로주체성이 어떻게 서양을 극복하고자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김상봉 선생이 옳다고 하자. 서양의 정신은 그 본질에서 자유의 정신이며, 한 번도 타자에 의해 자기를 상실한 경험을 갖지 못한 나르시스적 자유에 도취된 정신이라고 하자. 그리고 ‘우리’의 출발점이 서양과는 다르다고 하자. ‘우리’는 처음부터 서양과는 같은 방식으로 주체가 될 수 없었다고 하자.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는 자유롭기를 원하지 않는가. ‘우리’ 또한 자유롭기를 원했기 때문에 자기 상실의 경험을 그렇게 뼈아파 하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우리’는 서양과는 다른 자유를 꿈꿔야 하는가. 그러나 어떻게. 그리고 그 자유의 방식은, 예컨대 헤겔이 비록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상호) 인정’ 같은 개념을 통해 포착하고자 했던 그런 방식과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어떤 규정된 과거의 산물이거나 현재의 진상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설계여야 한다. 아마도 그 “우리”는 서로-주체들 이어야 할 것이다. 네가 있어 내가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서 자기를 찾고 서로로서만 자기로 있을 수 있는 그런 “우리”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우리”는 서로 그렇게 다르면서도 서로를 속 깊이 존중하고 관용하며 환대할 수 있는 그런 관계여야 할 것이고, ‘우리’보다도 못났다는 방글라데시 사람도 잘났다는 백인도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세계시민’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우리”를 꿈꿀 수 없는가.

장은주/영산대ㆍ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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