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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개혁의 덫』(부키 刊) 펴낸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
인터뷰: 『개혁의 덫』(부키 刊) 펴낸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10.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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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개혁의 환부 진단...국가개입 위한 논의 필요

신자유주의의 한복판에 온몸을 담그고 난 후에야 그것이 뭔가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달은 한국은 현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계층의 양극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이런 사회경제적 문제는 아젠다 세팅도 되지 않는 ‘비결정’의 영역에 웅크린 채 사회분열의 ‘현실적’ 불씨로 자라고 있다. 성장의 넘쳐흐름 효과가 분배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성장론자들은 아직까지 ‘개방’과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고 있지만, 이에 귀를 여는 쪽은 몰락한 ‘중산층’을 ‘대표’(?)한다는 현 정부와, 미국에 목맨 일부 계층 밖에는 없는 듯하다. 이런 시점에서 경제학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아마 그 동안 손을 놓았던 역사책도 좀 들춰보고, 非 미국 국가들도 관심있게 봐야 하지 않을까.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 사진)는 지속적으로 역사와 실증을 겸비한 채 한국경제를 관찰해온 학자로 꼽힌다. 뮈르달상을 수상한 ‘사다리 걷어차기’는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비판해 주목을 받았다. 그가 최근 ‘개혁의 덫’(이상 부키 刊)이란 칼럼집에서 국내 경제 개혁론자들을 비판하고 나서 시선을 끌고있다.

유연한 국가개입을 위한 논의 필요

이 책은 지난 10년간 추진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우리 경제를 망치고 있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친다. 1997년의 금융위기가 과도한 정부개입과 기형적 재벌체제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오히려 금융규제의 미비 같은 지나친 자유방임 정책 때문이라는 주장을 시작으로 해서 경제정책 전반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자고 추진한 국영기업의 성급한 민영화가 어떤 결과를 낳았나요. 공적자금 17조원이 투자된 제일은행을 5천억에 팔아치운 나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이건 제일은행이 매각된 후 1년 반 동안 올린 이윤에 불과한 낮은 가격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5년 정도는 버텨 제값을 받고 팔았어야죠.”

제조업 기반 경제구조로 거듭나야

계속 이어지는 그의 분석은 경제학적 실증성과 정치적 시각이 균형을 이루고 있어 수긍가는 점이 많다. 가령 최근 SK그룹의 최대주주가 된 외국계 크레스트 증권이 분식회계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은 SK의 경영구조를 투명화시킬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대표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와 접촉을 벌이는 것을 예로 든다. “사실 크레스트 증권은 그 모기업이 모나코라는 유명한 세금 도피처에 위치한 펀드로서 도덕성·투명성 운운할 처지가 못됩니다”라며 장 교수는 꼬집는다.

그의 안목은 정부역할 ‘축소론’이 아닌 ‘재정립론’을 펼치는 데서 매우 돋보인다. 그는 경제가 발전하면 민간 부문 능력이 향상되고 각종 제도가 성숙되면서 정부개입이 불필요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경제의 선진화를 이어가기 위한 첨단산업의 육성, 사양산업의 정리, 노동력의 질적 향상, 사회간접자본의 고급화, 복지·공공소비·소비자 권익의 확산과 향상, 노사관계의 선진화 등 새로운 개입 영역이 등장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방의 충격을 흡수하고 그 희생자들을 구제해 사회통합을 유지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정부가 팔을 걷어야 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 교수는 한국사회에서의 재벌의 중요성 인식 및 점진적 개혁, 공기업의 과도한 민영화 중단, 투자감소와 소비축소를 부른 ‘주범’인 주주자본주의 모델의 철폐 등을 거론한다. 특히 6T 산업에 ‘올인’하고, 허황된 금융허브를 꿈꾸는 것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한국경제의 성장동력이었던 제조업 기반을 죽이지 말고 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조업 제품에 대한 실수요는 고소득 사회가 돼도 줄지 않습니다. 최근 서양에서의 서비스업 증가현상은 ‘외주시스템’에 따른 통계적 환상도 섞여 있죠. 영국이 왜 금융업을 잘하면서도 국제수지 난을 겪겠습니까. 바로 제조업 경쟁에서 독일에 졌기 때문입니다. 스위스를 보세요. 우리는 그 나라가 관광수입만 올리는 줄 알지만, 실상은 기계·화학·제약 등을 중심으로 영국의 3배에 가까운 1인당 제조업 생산량을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그는 이공계 기피현상도 결국 제조업 활성화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땀 뻘뻘 흘리는 육체노동만 연상하지 말고, 한국적 교육수준에 맞는 제조업 분야에 설비 및 연구투자를 해서 중소기업을 안정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이공계 인력들도 직업안정성이 높은 기업 등에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장 교수는 이런 개별적 대안들이 실현가능성을 가지려면 좀더 체계적인 틀로 만들어지는 것을 거쳐 넓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적 조건과 각 선진국들의 경제모델이 만들어진 역사적 과정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선행돼야 하고, 경제학이 추상적 원론에서 벗어나 현장에서 성실하게 구해진 정확한 통계를 바탕으로 얘기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지적도 잊지 않는다.

‘은폐’와 ‘왜곡’을 그만두라

그의 최종 화살은 학계로 날아온다. 싱가포르와 미국을 예로 들 수 있다. 학자들은 “싱가포르를 벤치마킹 하자며 이 나라의 시장개방과 외자 적극유치만 강조하고, 싱가포르의 토지가 대부분 국유화돼 있다는 점은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미국이 부실금융기관에 국내총생산 3%에 달하는 거대자금을 투입해 조속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에서 드러나듯, 미국에서 진정으로 배울 것은 개방과 자유방임이 아니라 경제 민족주의와 정부의 시장 개입에 대한 '유연성'이라며 장 교수의 조언은 이어진다.

그의 통계분석과 그에 따른 전망이 보는 이에 따라서 이견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학에 부족한 ‘역사적’ 안목과 ‘정치적’ 관찰을 적절히 조합하는 그의 분석태도는 ‘시장주의’와 ‘반시장주의’라는 ‘신념적 대결’에 가까운 지형을 그리고 있는 한국 학계에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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