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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2] 극우∙극좌 오간 변절자를 이해하라고? 천만에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2] 극우∙극좌 오간 변절자를 이해하라고? 천만에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4.27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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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소렐

 

조르주 외젠 소렐(Georges Eugène Sorel, 1847~ 1922)은 흔히 아나키스트로 소개되지만, 나는 그를 아나키스트로 소개하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다.
조르주 외젠 소렐(Georges Eugène Sorel, 1847~ 1922)은 흔히 아나키스트로 소개되지만, 나는 그를 아나키스트로 소개하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다.

 

지금까지 아나키스트로 소개한 사람들 중에 그들을 아나키스트로 볼 수 있는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한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고드윈, 슈티르너,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과 같은 고전적인 아나키즘 이론가들만 아나키스트로 보는 사람들은 특히 내가 종교인들이나 교육학자, 또는 화가나 작가나 시인, 심지어 가수들을 아나키스트로 보는 점에 대해 의문을 가질지 모른다. 그런데 그들을 다루면서 설명했듯이 아나키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들은 종교인, 예술가, 교육자들이다. 이는 종교, 교육, 예술이 다른 어떤 영역보다도 반국가적이고 반권력적이며 반자본적이고 반물질적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아나키즘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특히 우리의 종교, 교육, 예술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그 점을 더 강조하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지금 소개하려는 조르주 외젠 소렐(Georges Eugène Sorel, 1847~ 1922)은 흔히 아나키스트로 소개되지만, 나는 그를 아나키스트로 소개하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어서 그에 대한 이 글을 쓰는 데 무척이나 망설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폭력주의자이고 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레닌의 볼셰비즘이나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아나키즘은 절대로 어울릴 수 없으며 극좌와 극우를 몇 번이나 오간, 그야말로 카멜레온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주변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보았지만 그런 변절을 옳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소렐에 대해 19세기말 20세기 초의 복잡한 정치상황에서 소렐이 그렇게 변절한 것을 그럴 듯하게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 시대 이상으로 복잡한 양상인 우리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렇게 변절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너그럽게 봐주지는 못한다. 프랑스의 100년 전이 지금 우리보다 더 복잡해서 그런 변절을 이해하라고? 천만에. 그렇게 변절하지 않고, 그런 변절을 욕하며 일관되게 산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일제와 박정희와 김일성과 노무현을 모두 추종한 셈

 

꼭 나와 같은 생각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우리에게 소렐의 소개는 너무나 늦었다. 1908년에 나온 『폭력에 대한 성찰』은 1세기 뒤인 2007년에, 같은 1908년에 나온 『진보의 환상』은 112년 뒤인 2020년에야 번역되었다. 너무나 늦었음에도 그렇게라도 소개되는 것에 의미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 책들이 지금 우리에게 모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나로서는 ‘동서양 학술명저 번역총서’ 따위로 번역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소렐의 의미를 프레포지에가 『아나키즘의 역사』에서 말한 것처럼 그가 말한 ‘총파업’이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노동자의 정신 속에서 매력적인 힘으로 남아 있다’(462쪽)고 한 정도로라도 인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도 맹목적인 총파업을 통해 계급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이 있을까? 프레포지에의 말과는 반대로 일시 ‘총파업’을 주장했다가 몇 년 지나지도 않아 그것을 포기한 소렐의 의미는 레닌이나 무솔리니에 의해 실현된 극단적인 권력추구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소렐이야말로 가장 반아나키즘적인 자가 아닌가? 여하튼 여기서는 그에 대해 최소한으로나마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자.

 

 

프랑스 서부 시골에서 파산한 포도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의 명문 이공대학인 에콜폴리테크니크에서 공부하고 토목 관리로 살다가 45세가 된 1892년 은퇴하고 독학으로 사회이론을 공부했다. 은퇴 이전 본래의 그는 부르주아 출신 ‘공돌이’ 관료답게 보수주의자, 군주주의자, 전통주의자였다. 그러다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급변했다가 다시 개량적 사회주의로 약화되면서 드레퓌스 사건 동안에 드레퓌스파 쪽에서 활동했다가, 다시 극좌파로 돌아서서 『폭력에 대한 성찰』과 『진보의 환상』 등을 쓴 뒤에, 자신이 주장한 ‘총파업’을 불신하면서 본래의 반유대주의와 극우 왕정주의자로 돌아섰고, 말년에는 다시 볼셰비키 혁명과 레닌을 극찬하는 극좌로 돌아섰다. 즉 극우 파시즘과 극좌 사회주의를 몇 번이나 넘나든 인물이어서 그를 보면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일제와 박정희와 김일성과 노무현을 동시에 추종한 셈이다. 물론 권력이나 돈을 추구하여 멋대로 변절할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이론가로서의 변모였지만 말이다.

 

니체∙베르그송∙바쿠닌을 추종했던 급진주의는 결국 파시즘으로

 

그러나 그 변절의 본질은 니체의 권력의지와 같은 권력주의라는 점에서 하나였다. 변화를 위한 유일한 방법을 힘의 적용을 통한 것이라고 본 프랑스의 자코뱅 전통에 입각한 그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극좌와 극우를 좌충우돌했다. 그가 처음부터 샤를 모라스(Charles Maurras, 1868~1952)와 그가 지도한 악시옹 프랑세즈(Action Française)를 찬양한 것은 프랑스적 영웅주의 내지 권력주의의 소산이었다. 통합국민주의(정부나 국가가 사회의 모든 면을 통제하는 전체주의), 군주주의, 협동조합주의를 옹호하는 반면 민주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에 반대한 모라스주의는 반혁명 이념교리로서, 프랑스라는 국가의 응집과 위대함을 긍정하고 왕당파를 옹호했다. 나아가 혁명정신과 낭만주의 정신이야말로 실패의 원인이며, 그 정신을 잉태한 자유주의 세력들인 유대인, 개신교, 프리메이슨, 외국인이라는 ‘반프랑스 세력’으로 그들은 프랑스 국민국가의 일부로 존재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뒤에 무솔리니의 파시즘으로 이어진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전개된 극우 왕정복고 운동 '악시옹 프랑세즈'와 이를 주도하면서 이론적 기틀을 제공한 샤를 모라스(왼쪽).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전개된 극우 왕정복고 운동 '악시옹 프랑세즈'와 이를 주도하면서 이론적 기틀을 제공한 샤를 모라스(왼쪽).

 

소렐이 뒤에 레닌을 찬양했지만 초기 저작에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 변증법적 유물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같이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적이어서 진리라고 주장한 합리주의와 유토피아적 성향을 비판하고, 치명적으로 쇠퇴한 부르주아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구원을 약속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진리라고 믿은 점도 힘에 대한 숭배에서 나왔다. 즉 필연적이고 혁명적인 변화를 믿는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고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직접적인 행동을 좋아했다. 신화의 중요성을 밝혀내고 과학적 유물론을 비판한 베르그송, 초인의 영웅주의적인 위대함을 예찬하고 평범함을 증오한 니체, 민주주의의 잠재적 부패성을 비판한 보수주의자 토크빌이나 르낭을 소렐이 좋아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바쿠닌의 아나르코코뮤니즘(anarcho-communism)를 지지하고 프루동처럼 사회주의를 근본적으로 도덕적 질문으로 본 점도 마찬가지였다. 현존하는 질서를 급진적이고 폭력적으로 전복하는 것이야 말로 좀 더 나은 미래로 가는 확실한 길이라고 믿고 대중을 일치된 행동으로 동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된 '신화'의 필요성에 대한 소렐의 믿음은 1920년대 대중 파시즘 운동으로 실현되었다. 무솔리니는 "내가 가장 큰 빚을 진 자는 바로 소렐이다"라며 소렐을 '파시즘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인 아버지'라 불렸다. 또 프랑스 파시스트당의 창립자인 조르주 발루아(Georges Valois, 1878~1954)는 소렐을 파시즘의 정신적 시조로 간주하고 "파시즘의 진정한 지적, 감정적 기원은 소렐의 사회주의이다"고 지적했다.

 

아나키즘의 본질은 비폭력, 소렐은 지지받기 어려워

 

소렐은 폭력과 무력을 구별하여 ‘프롤레타리아트 폭력’으로 ‘부르주아 무력’을 반대하며 전자는 정화 효과가 있고 사람들이 스스로를 소유할 수 있게 해주고, 총파업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영감을 주는 '사회적 신화'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소렐에게 사회적 신화는 '사물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행동하겠다는 결의의 표현'이기 때문에 중요했다. ‘의회 사회주의는 도덕성에 대한 경멸을 공언’하고 생산자들의 새로운 윤리를 공언하기 때문에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인정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지만, 혁명적 의지와 프롤레타리아 폭력에 대한 소렐의 찬양은 왼쪽보다 오른쪽에 더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산업화에 의해 착취되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사회를 노동조합을 통해 붕괴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생디칼리슴(Syndicalisme, 노동조합주의, 노동자주의 또는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라고도 번역되지만 생디칼리슴에는 독특한 의미가 있어서 보통 그렇게 표기된다) 운동에 소렐이 영향을 끼쳤다고도 하지만 그 운동 자체는 총파업이 신화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생디칼리즘 이론가들에게 대한 소렐의 영향을 미미했을 뿐이었다. 소렐이 피에 굶주렸다는 평판을 받았지만 산업 사보타주에 반대했고, 생디칼리스트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을 뒤흔든 테러와 같은 가증한 행위로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을 본질로 하는 아나키즘에서 소렐의 폭력은 식민지 체제나 독재체제와 같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지지하기 어렵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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