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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의시간-“아직 당신만큼 크지 않았잖아”
나의 강의시간-“아직 당신만큼 크지 않았잖아”
  • 김현기 수원대
  • 승인 2004.09.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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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교수(수원대·전기공학과)


‘수신: 김현기 선생님’

교수신문의 원고 청탁 공문에 인쇄돼 온 수신인 호칭이다. 우리 대학사회 교수들 중에서 ‘선생’은 얼마나 있는가 하고 자문하며, 자괴감으로 번민하던 나이기에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반갑기 그지 없었다.

 

대기업에서 기술과 기획부서에서 근무를 하다가 계기가 있어서 대학에 몸을 담게 됐지만 지금도 언제나 학생 시절에 바라보던 그 ‘선생’의 모습으로 가고 있는가,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국어사전을 들춰보지 않더라도 ‘교수’라는 지식인의 대표적인 직업의 명칭보다는 뭔지 모르게 두루 높임말로 쓰이는 ‘선생’이 친근감도 있고 듣기에도 기분이 좋다.

전문적 지식인을 만들어야 하고 다음 세대의 바른 지성인을 양성해야 하는 것이 대학교수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의무이다. 그러기에 나는 항상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동시에 알파가 더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공학의 수학적 해석을 하는 딱딱한 전공강의인 나의 수업시간에, 나는 종종 간과하고 있는 우리 전공의 중요성을 깨우치며 긍지를 심어주고자 시간을 할애한다. 학생들에게 개개의 단편적인 지식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하나의 지식을 큰 틀에서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게 하기 위해서 주변에 알게 모르게 존재하는 생활 속의 전공을 이야기 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우리 생활에서 전기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보통사람들의 생각에 전기라 하면 벽에 있는 콘센트에 꽂으면 그냥 나오는, 마치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마시는 공기나 태양빛처럼 공짜로 생기는 에너지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전기는 거대한 전기공장으로부터 생산돼 특별히 만들어진 길을 따라 운반돼 오는 과정에서 많은 시설물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먼 길을 오면서 그 질이 변하지 않도록 하는 품질관리가 필수적이다. 균질의 전기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을 때 생명을 다루는 병원, 국가 기간산업의 공장들은 물론, 각 회사와 가정의 컴퓨터는 그 기능을 잃게 된다. TV, 오디오, 에어컨 등의 많은 가전제품을 사용할 수 있는, 생활의 편리함을 누리는 것도 포기해야 한다. 이렇듯 깜깜한 어둠을 밝히는 밤의 태양으로서 전기의 중요성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다."

이렇듯 눈앞에 보이는 자그마한 지식을 커다란 시야 속에서 조망해주면, 학기 초 딱딱한 과목에서 느끼는 학생들의 난감했던 표정들이 서서히 진지해지는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 보인다.

‘바른 지성인’을 기르기 위한 선생의 역할은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는 오래 전 잊지 못할 경험에서 연유한다. 강단에 선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당시 나는 가르침과 진도에 대한 욕심으로 강의를 마쳐야 하는 시간임에도 수업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수업을 마쳐야하는 시간이 됐음을 지적하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학생들을 위한 나의 배려에 그러한 반응은 적지 않게 실망스러웠다.

얼마 후 중간고사 기간이 됐다. 모든 학생들이 열심히 시험에 집중하고 있는데 무언가를 왼손에 넣고 두리번거리고 있는 한 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속상하게 했던 바로 그 학생이었다. 나는 가만히 그 학생의 곁에 가서 다른 학생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잠시 주춤하던 그는 쪽지를 내놓았고 나는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커닝사건’ 이후 그 학생은 항상 맨 앞자리에서 수업에 놀라울 만큼 열심히 임했고 기말고사에서 결국 1등을 했다. 철없는 학생을 중징계하는 일벌백계의 학칙보다는 선생의 지성적 판단으로 사랑에 의한 묵인이 경우에 따라서는 훨씬 효과적일 수 있던 경우였다.

여전히 내가 바라던 ‘선생’의 모습에 좀 더 다가섰는지 의문이지만, 커닝사건 이후 동료 교수에게 ‘조언’ 한 마디쯤 건넬 수 있게 됐다. 동료 교수와 환담을 하다가 속 썩이는 학생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이야기 한다.

 

“ 박선생,  그 친구는 아직 당신만큼 크지 않았잖아”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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