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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 문턱의 ‘후진’ 양당 정치
‘선진국(?)’ 문턱의 ‘후진’ 양당 정치
  •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
  • 승인 2021.04.27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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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환 성균관대 교수 기고_ 『추월의 시대』 그리고 4.7재보궐 선거를 보고①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 ‘헬조선’과 ‘국뽕’ 사이, 한국사회의 좌표는 어디일까. 지난해 12월 출간된 『추월의 시대』(메디치미디어, 2020)는 한국사회가 여태껏 자신에 대한 ‘맹목적 비관’에 빠져 있었다며 ‘자기객관화’를 통한 ‘현명한 낙관’을 도모한 기획이었다. 여기에 호응하는 목소리가 정계와 미디어에서 하나 둘 쌓여 가던 때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국어국문학과)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낙관’하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가 된다. 허나 폭력성과 잔인함이 ‘추월’의 동력인 상황은 앞으로 지속될 듯 하다.” “’K번영’은 혐오와 차별, 지속불가능성 위에 구축돼 있다”는 진단이다. <교수신문>은 천 교수에게 더 구체적인 발제를 요청했다. 천 교수는 독후감을 넘어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맥락 전반을 톺아보고 다시 질문하는 글을 보내왔다. 이를 2회에 나눠 싣는다. 재보궐 선거가 막 마무리되고 20번째 대선을 10여개월 앞둔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나.

 

재보궐선거 이튿날인 4월 8일 한국 정치의 풍경.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갈채를 받으며 의원 총회에 들어섰고 청와대와 민주당 지도부는 카메라 앞에 고개를 숙였다. 사진=연합
재보궐선거 이튿날인 4월 8일 한국 정치의 풍경.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갈채를 받으며 의원 총회에 들어섰고 청와대와 민주당 지도부는 카메라 앞에 고개를 숙였다. 사진=연합

 

K와 k에 대하여: 『추월의 시대』에 부쳐

'감정정치'가 개혁의 약속을 좌초시켰다

 

20세기 이후 지금까지 줄곧 한국인들은 세계 속의, 그리고 열강의 틈바구니 사이에서의 자기 위치를 확인하려 해왔다. ‘우승열패’라는 국제 권력정치(power politics)와 냉엄한 지정학적 현실에 대한 주체의 반응 기제였다. 한국인의 수난 경험과 불안한 집단 심리는 민족주의(‘국뽕’)나 자가 오리엔탈리즘(‘국까’)으로 왕복 현상해왔다. 이는 건강하고 성숙한 자의식과는 거리가 있는, 비유하자면 경계성 인격장애나 나르시시즘 상태와 비슷했다. 즉 한국인은 자기비하와 열등감, 아니면 타자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나 비이성적 혐오 사이를 왕복운동했던 것이다.

어떤 시대마다 써져 온 한국(인)론은 이 같은 집단심리에 자기 이해와 자기지식을 더한 일종의 ‘위상학’이었다. 이를 통해 한 시대의 한국인들은 그 시대에 어울리는 자기 서사담론을 읽고 내면화해왔다. 예컨대 식민지시대 ‘민족’의 수난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나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훗날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만들었고, 개발연대에는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같은 책이 읽혔다. IMF 위기를 겪고 반강제로 ‘세계화’를 급히 수용해야 했던 시절에는 탁석산의 『한국인의 정체성』이 읽혔다.

근년에는 『축적의 시간』(2015) 같은 책이 나와 한국의 새로운 위상과 한국인의 달라진 자의식이 뭔지 알려주었다. 양승훈 교수 등이 함께 쓴 『추월의 시대』에도 영향을 준듯한 이 책은 ‘선진국’ 문턱과 중국 등 ‘신흥국’의 추격 사이에 끼어있는 한국에는 기존의 ‘추격 모델’을 대신할 창의적 ‘개념 설계 역량’이 없다는 사실을 호소력 있게 말했다.

 

‘선진국’ 거울 앞의 나르시스

 

그런데 대개 이런 담론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이며,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이며 주관적이다. 남과 ‘우리’를 비교하고 GDP, 군사력, 경쟁력 등의 ‘순위’로 표시되는 표상과 수치에 의존한다. 또한 ‘선진국’ ‘중진국 ‘후진국’ 같은 통속적이고 발전주의적인 위계의 감각에 근거한다. 그런 타자와의 비교를 통해 도출되는 “자긍심의 정치”(국뽕)냐 “열등감의 정치”(국까)냐, ‘비관’이냐 ‘낙관’이냐는 기실 동전의 양면일 것이다.

 

 

작년 말에 나온 『추월의 시대』가 처한 맥락도 이런 데서 이해가능하다. ‘촛불 이후’ 그리고 팬데믹의 시대 이 ‘민족’은 뭔가 새로운 자기이해 또는 위치잡기(positioning)가 필요한 것이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 양면에서 세계사적으로 드문 성공을 달성했다는 긍정적 자평과, K-컬쳐가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K방역이 세계 최고의 성과를 거뒀다(?)는 ‘K-부심’이 2020년 내내 팽배했다.

『추월의 시대』가 앞에서 거명한 책들만큼 많이 읽히는 한 시대의 책이 될 수 있을지는 예단하기 힘들지만, 그런 징후와 자질을 갖고 있어 보인다. 그만큼 이 책의 ‘한국 위치 잡기’를 위한 프레이밍은 흥미롭고도 성공적으로 오늘의 실제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를테면 더 이상 한국은 ‘약소국’이 아니며, 오늘날 한국사회가 처한 여러 문제들은 ‘선진국형’ 문제며, (특히 펜데믹 상황에서 바닥을 드러낸) 구미와 일본 등을 흉내내고 따라잡기 위한 ‘추격’이 아닌 ‘추월’에 걸맞은 새로운 정치∙사회적 아젠다와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 이를 위해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대립’(또는 그를 통한 인식)을 지양하고 ‘책임 있는 포퓰리즘’과 ‘현명한 낙관’으로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 등등. 다 주목할만한 프레이밍이자 서사며, 또 새로운 세대의 자신감 있는 제안으로 읽혔다.

공감한 데가 많은 만큼 아쉬움도 있었다. 동의하기 쉽지 않은 전제도 있었다. 책에 대한 칭찬은 충분히 많이 나왔을 테니, 필자는 고개를 갸웃거린 대목과 함께 4.7 보선 이후의 상황과 관련된 ‘메타 독후감’ 한두 가지를 이야기하련다.

이야기는 결국 가히 ‘선진적’이고 ‘국뽕’할만한 한국(K)과 부정적이고 사람이 살기 힘든 ‘헬조선’으로서의 한국(k)의 병치에 대한 것으로 수렴될 듯하다. K와 k의 병치는 점점 더 기괴하고도 드라마틱해진다.

 

‘산업화 세대 대 민주화 세대’의 대결?

 

우선 민주당과 국민의힘 양당에 의해 주도되는 한국 정치를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대립’(또는 그를 통한 인식)을 지양(‘세대’와 ‘세력’이 혼용된다)해야 한다는 전제는 큰 틀에서 동감하면서도 다른 각도에서의 보충이 꼭 필요하다 생각한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했다는 두 세대 주체는 이제 정치세력으로서 그 실상이 불분명하다. 물론 박정희 시대가 남긴 유산과 시대착오적인 박근혜 정권이 그 대립이 현존하는 것인 양 보이게 했지만, 양자의 대립도 사실상 이미 과거의 것이라 보인다. ‘산업화(세력)’ 대 ‘민주화(세력)’의 대립은 1990~2000년대를 거치며 실제로는 해소되었다고 본다.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한 DJP연합은 그 정치적 상징이다.

예컨대 1990년대 중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세계 경영’을 위해 학생운동권 출신을 수백 명 채용한 일이 있었다. 그들은 운동권 중 가장 선명하게 ‘사회주의’를 내세웠던 사노맹 출신부터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거의 없는 주사파까지 골고루였다. 이런 에피소드는 별로 논의되지 않는 ‘민주화 세대’의 1990년대 이후의 실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한 예다. ‘민주화 세대’는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세계화’와 ‘신경제’(IT 벤쳐 열풍)에 뛰어들어 그 주체가 되거나 ‘산업화 세대’가 만들어놓은 한국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출세했다. 또는 ‘민주화 세대’는 오늘날의 한국이 있게 한 1990~2000년대의 (그렇게 말해도 된다면) ‘제2의 산업화’의 주역이기도 한 것이다.

 

지난해 11월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 중인 조국 전 법무부장관. 사진=연합
지난해 11월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 중인 조국 전 법무부장관. 사진=연합

 

그렇다면 현 집권세력의 주류인 ‘친문’과 청와대의 요직을 차지했던 참여연대 등의 시민사회 출신의 ‘강남좌파’나 전대협동우회를 위시한 민주당 586들은 과연 (어떤) ‘민주화’라는 가치를 대변하는가?

이제 문재인 정권의 계급성과 통치성을 설명하는 더 없는 국제적인 테제가 돼 버린 ‘내로남불(Naeronambul)’은, 그 주체(586세대)들이 말로는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듯 했지만 기실 그들이야말로 온몸으로 1990년대~2000년대의 한국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에 순응하고 그 수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뜻한다. 아마도 호남과 수도권 지역의 토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산업화 세대’ 민주당 정치인들과 근래 삼성전자, LG, 웹젠 등에서 영입된 인물들, 그리고 홍석현∙이현재 등과 함께 여시재를 운영한 이광재 의원 같은 사람들은 어떤가. 전성안의 지적대로 문재인 정부는 구 재벌뿐 아니라 네이버, 카카오와 같은 ‘신흥재벌’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전에 없던 새로운 정경유착을 실행하고 있다.(전성인 칼럼 : 우리는 지금 쇄신과 개혁을 보고 있는가? <경향신문>, 2021.4.19.) 이런 사실들을 보면 민주당은 자본가계급의 한쪽 블럭을 대의하는 계급정당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10년 전쯤 사회과학자들은 이명박 정권을 ‘안보보수’(이념보수)와 ‘시장보수’의 연합체로 봤는데, 민주당이야말로 ‘감정보수(이념보수)’와 ‘시장보수’의 연합체가 아닐까?

 

적대적 공존의 속살: 감정정치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존재방식은 ‘적대적 공존’으로 보는 입장이 여전히 적절한 듯하다. 현재 민주당 주류(특히 친문)의 정체성이 경제, 노동, 복지 정책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다. 그 정체성은 ‘노무현 트라우마’와 이제 어디에도 내놓을 수 없게 된 ‘민주화 운동’의 훈장밖에 없다. 안희정, 이광재, 우상호, 임종석 등 노무현∙문재인 정권 양쪽 다에 걸친 586 핵심그룹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계급, 생태, 젠더, 지역, 세대 등의 불평등 해소를 통해서만 이뤄질 차별 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거의 없는 듯하다. 그들의 시계는 ‘노무현의 시간’(즉 2002년 또는 2009년)에 멈춰있다 보인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열화(劣化) 복제판’이라는 말도 이런 데서 나왔을 것이다.

어쨌든 한편으로 노무현 정부는 한국의 지배구조 - 검찰, 언론, 서울, 강남, 사학재단 등에 대한 도전하는 자세는 보였었다. 그래서 보수언론과 기득권은 노무현 정부와 이념 전쟁에 몰두하고 재임 중에는 탄핵을 기획하고, 퇴임 후에도 정치보복을 감행했다. 결국 이명박 정권의 정치검찰에 의해 야기된 노무현의 죽음 이후에 형성된 정치적 감정구조와 그에 따른 증환은 치유되지 못하고 더 커지고 변질돼 왔다.

 

2009년 5월 29일 국민장이 열린 서울 시청앞 서울광장에서 故노무현 전 대통령 운구행렬을 지켜보는 시민들. 사진=연합
2009년 5월 29일 국민장이 열린 서울 시청앞 서울광장에서 故노무현 전 대통령 운구행렬을 지켜보는 시민들. 사진=연합

 

‘감정’은 지지자들에 의해서는 일면 노무현을 죽음으로 몬 자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일면 노무현에 대한 죄의식과 우상화로 이어졌다. 이런 감정이 단지 마음 속 감정이 아니라, 현실에서 물질성을 가진 정치적 행동과 언어, 그리고 정치적 주체들로 응결∙재생산되어 왔다.

소위 ‘촛불혁명’은 원한과 진영정치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로 갈 결정적인 돌파구가 될 수 있었다. 김어준은 2009년 5월 23일 이후 공식석상에서 검은색 넥타이만 하고 다녔지만 2017년 봄 소위 ‘촛불혁명’을 거쳐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 검은 넥타이를 풀었다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죄의식이나 우상화를 강요하지 않으며, 기억은 제대로 하되 객관적 평가와 함께 과거는 역사 속으로 보내고, 새로운 현실을 살아가야 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과 그 정부의 사람들은 그럴만한 능력은 없었다. 약속했던 개혁의 실패와 함께 오히려 다시 증오의 정치와 진영논리의 악순환으로 들어갔다. 결정적으로 일이 복잡하게 꼬여버린 계기는 알다시피 ‘조국 사태’였다. (계속)

 

 

천정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근대의 책읽기』, 『자살론』, 『대중지성의 시대』, 『촛불 이후, K-민주주의와 문화정치』, 『1970, 박정희 모더니즘』(공저) 등의 책을 썼고 민교협, 지식공유연대, 인문학협동조합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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