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3:15 (목)
거대담론과 일상적 삶 가로지르기 그러나 자기배반적인 글쓰기
거대담론과 일상적 삶 가로지르기 그러나 자기배반적인 글쓰기
  • 교수신문
  • 승인 2001.05.0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1-05-03 17:22:28
돌이켜보자면, 김진석 교수의 글은 내게 쉽게 읽히지 않았었다. 나는 그의 책을 몇 권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열리지 않은 채 남아 있었을 뿐이다. 그의 글은 기이하게 흐느적거리면서, 순간순간 옆으로 삐쭉거리고 나오거나, 재빨리 움직이면서, 또한 허덕대고 멈춰 선다. 호흡의 정지. 날숨과 들숨의 어긋남. 한없이 계속되는 듯한 장광설과 饒舌, 이것이 내가 그의 글에 대해 가졌던 인상이자 편견이었다.

‘이상현실 가상현실 환상현실’의 읽기는 ‘쟁점서평’으로서 내게 강제되었다. 그러나 강제가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차이의 철학’을 육화하려는 나름의 시도와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남, 그것은 다름을 전제한다. 차가운 눈길로 돌아보거나, 무심하게 지나치는 것보다 만남은, 그것이 다소 불편한 것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행복한 경험인가.

‘이상현실 가상현실 환상현실’은 먼저 철학적 글쓰기의 우상을 부순다. 이 책은, 서론/본론/결론의 논리적 서술체제, 논변의 정식화, 각주와 참고문헌에 대한 과도한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렇다고 해서 김진석이, 요새 유행하는 이른바 논문중심주의에 대한 공격에 무임승차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지식인 사회에서 근래 회자되는 ‘새로운 글쓰기’의 치명적 결함은, 수사학이 내용을 압도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에 비해 이 책의 글쓰기는, 초월이 견인하는 이상현실/가상현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있는 듯 없는 듯 ‘정확한 애매함’의 상태로 실재하는 환상현실의 지평에 대해 엉금엉금, 그러나 집요하게 ‘포월’해 들어가기 위해 채택된 필수적 전략이다. 바꿔 말하면, 김진석의 만연체적 글쓰기, 또는 흐드러짐의 미학은 이상현실을 추동하는 형이상학과 변증법, 그리고 가상현실을 추종하는 기술지상주의의 강고한 성채를 파고 들어가, 그 사이에 틈새를 내고 흔적을 남기려는, 즉 ‘疎內’하려는 고유한 철학적 비판과 실천의 한 형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의 글을 따라 읽으면서 느꼈던 불편함은 이제 사라졌는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그 불편함은 과거의 무관심으로부터 탈바꿈해서, 새겨지고 음미된 상태로 지속될 뿐이다. 낯선 글과의 만남, 그것은 창조적 긴장의 공간이며, 장려되어야 할 이질성에 대한 승인이다. 나는 아직도 철학적 글쓰기에서 사유의 투명함과 단단함, 자기절제와 엄격성, 명징한 서술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아름다움을 선호한다. 허나 아름다움의 경험은 당연히 다양함을 전제하고, 요구할 것이다. 뒤늦은 깨달음이기는 하지만, 때와 문맥과 취향에 따라 글쓰기가 다를 수 있고, 달라야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상현실 가상현실 환상현실’은 거대담론과 일상적 삶의 세계라는 공소한 이분법을 가로지르려 한다. 이질적인 것들의 혼재라는 사태를 총체성의 범주로 질식시키려 했던 형이상학과, 목적론의 신화를 결코 넘어설 수 없었던 변증법은 이상의 기치아래 역사 현실과 삼투하여 이상현실을 구성한다. 기술문명의 진화에 따라 정교해진 정보 매체, 사이버 공간의 일반화는 현실보다 더 생생한 가상의 이름아래 구체적 현실과 교접하여 가상현실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포월의 글쓰기와 사색이 그 모습을 벗겨내려는 환상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상과 가상이 현실을 초월하는 독립적 실체도 아니고, 인간의 행위를 초월하는 순수한 의미도 아니라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나아가 이상현실과 가상현실을 서로 적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동시에 두 현실들을 단순히 거부하지 않는 관점으로부터 비로소 환상현실이 배태된다. “현실의 모든 복합적이고 복잡한 모양이 다 보이는 곳”으로서 명명된 환상현실은 이상/가상/현실이 교차되고 중첩되는 動學에 대한 거시/미시적 분석으로서 구상화된다.

그러나 첨단무기의 가상성으로부터 시작해서, 삐삐나 휴대폰을 매개로 삼아 시민운동과 생태주의의 허점을 고발하고, 죽음의 문제를 삶의 담론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김진석의 다양한 실험은 그의 희망과는 다르게 현실의 복합적이고 복잡한 모양을 극히 일부분만 단편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바꿔 말하면, 이 책은 거대담론과 미시정치학적 분석사이에 현격한 불균형을 드러내면서, 환상현실과 포월 자체를 거대담론화 시키는 경향을 드러낸다. 이것은 기이한 자기 배반적 사태다. 왜냐하면 환상현실과 포월은, 큰 이야기와 생활세계가 서로 겹치고 어긋나는 바로 그 지형과 동학에 대한 역동적이고 구체적인 해명이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