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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정치성
철학의 정치성
  • 김상봉 / 서평위원·서양철학
  • 승인 2001.05.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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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수상]
우리는 철학에 대해 말할 때 언제나 정치적 문맥을 배제한 채 보편적 이론으로서의 철학을 말하는 일에 익숙해 있다. 이제 이런 타성을 문제삼을 때가 되었다. 철학은 정치와 상관없는 사고실험, 생각의 유희가 아니다. 정치와 무관한 철학은 현실과 무관한 철학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실은 언제나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이 정치를 무시하는 순간, 그것은 현실을 외면하고 언필칭 보편적 진리를 핑계삼아 현실과 유리된 한갓 공허한 관념의 성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게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철학과 인문학의 위기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나, 대개의 경우 사태의 본질과 매우 동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존재이유를 의심받는 까닭은 우리의 인문학, 특히 철학의 비정치성과 탈정치성 때문이다. 우리의 철학은 정치 밖에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현실 밖에 있다. 그렇다면 누가 현실 밖에 있는 철학에 대해 애틋한 관심을 표시할 것인가. 현실 밖에 있다는 것, 그것은 죽어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우리는 죽은 자를 애도할 수는 있어도 죽은 자에게 관심을 표시할 수는 없다. 철학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철학이 정치를 떠날 때 그것은 생명을 상실한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이미 죽어버린 철학에 대해 애도를 표시할 뿐인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 정치적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정치학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철학은 철학이지 사회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이 정치적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가장 보편적 원리에 입각해서 삶에 대해, 정치에 대해 발언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존재의 진리에 입각해서, 가장 보편적인 선의 원리에 입각해서, 아름다움의 원리에 입각해서 그리고 성스러움의 원리에 입각해서 세속적인 정치를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양철학자들이 각자 나름대로 정치적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동양철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형이상학은 곧 현실정치의 이데올로기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이 땅의 철학자들은 과거의 철학이나 남의 철학의 정치성에 대해서는 자못 감동과 숭배의 마음을 보이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철학적 사유 속에서 정치적 실천을 추구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철학의 정치적 함의는 언제나 과거의 일이나 남의 일로 회고될 뿐, 오늘 우리시대를 변화시키고 개선하는 힘으로 나타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철학이 현실을 변혁시키는 힘을 상실한다면, 그때 철학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우리가 철학과 인문학의 위기를 진심으로 염려한다면, 더 늦기 전에 정치적 현실의 한 가운데서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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