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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_ 리카도식 폐습
학이사_ 리카도식 폐습
  • 김진방 인하대
  • 승인 2004.09.30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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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스미스가 1776년 ‘국부론’에서 경제학의 내용을 제시했다면, 리카도는 1817년 ‘정치경제와 과세의 원리’에서 경제학의 방법을 제시했다. 리카도의 과감한 捨象은 경제학의 전통이 됐고, 리카도의 단순한 모형은 경제학의 표준이 됐다. 리카도에 의해 경제학이 과학의 반열에 서게 됐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20세기 경제학의 거인으로 일컬어지는 슘페터의 평가는 다르다. 리카도에게서 경제학의 ‘폐습’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리카도가 그리했듯이, 경제학자들의 과감한 捨象과 단순한 모형은 종종 무모한 적용으로 이어지고, 모형의 작동 원리는 그대로 현실의 작동 원리로 간주되곤 한다. 경제학에서 현실 경제는 사라지고 ‘장난감 경제’만 남았다는 한탄이 나오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물론 경제학에 실증주의가 전파되고 통계학의 기법이 사용되면서 많이 달라지긴 했다. 그러나 리카도의 폐습은 여전히 주류 경제학의 전통으로 남아 있다.

리카도에게서 비롯된 경제학의 폐습은 내 주변에서도 가끔 목격된다. 市場至上主義로 분류될 주장들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는데, 현실과는 동떨어진 定理로부터 곧장 특정 정책이 제안되기도 하고, 지극히 추상적인 원리로부터 대뜸 구체적인 예측이 나오기도 한다. 심지어 동어반복에 가까운 명제로부터 쉽사리 현상에 관한 언명이 도출되기도 한다. 이는 리카도의 폐습보다 더 심한 ‘리카도식 폐습’이다.

슘페터는 리카도의 폐습에서 방법론적 미숙함을 보았으나 나는 내 주변의 ‘리카도식 폐습’에서 신념의 과잉을 본다. 과학을 밀쳐내고 신념이 나서면 분석은 과감해지고 단순해지고 무모해지기 쉽다. 그리고 신념은 豫斷을 동반한다. 豫斷이 실증을 대신할 때 오류는 인지될 수 없다. 신념만 강화될 뿐이다. 관찰은 경시되고 성찰만 중시될 때도 그렇다. 그래서 내 주변의 ‘리카도식 폐습’은 더욱 고쳐지기 어려울 듯하다.

요즈음 나는 한 가지를 더 알게 됐다. 이런 저런 토론에 참여하거나 관람하는 일이 늘면서 알게 된 것이다. 과학보다 신념이 앞서고 豫斷이 실증을 대신하는 곳에서는 논리가 줄어들고 修辭가 늘어난다. 많은 지면이나 시간이 비유와 수식어로 메워진다. 비판이 적어지고 비난이 많아진다. 발언의 내용보다는 그 의도를 의심하고 발언자의 자질을 거론하는 경우도 있다. 경제학의 이름으로 선언문이 낭독되기도 하고, 印象을 나열한 글이 학술회의에서 발표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리카도의 폐습을 다시 보게 됐다. 이제는 리카도의 엄격함과 명쾌함이 돋보이고, 그와 맬더스의 진지하고 차분한 논쟁이 부럽다. 

내가 본 내 주변이 이러한데, 내 주변에서 본 나는 어떠할까. 그들이 보기에 나는 얼마나 과학과 실증과 논리에 충실할까. 내 딴에는 힘껏 자료를 수집해서 통계를 확인하고, 그러한 자료와 통계로 뒷받침할 수 있는 것만을 주장하려 했다. 측정할 수 없는 개념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논리의 비약을 줄이고, 내용의 모순을 해소하고, 修辭를 피하려 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내가 더 이념에 치우치고 예단을 일삼고 논리를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대에 뒤떨어진 모더니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스스로를 더욱 닦달하고 가다듬을 뿐이다.

김진방/인하대·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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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인 2005-08-18 20:43:29
역설적이지만 '수사와 주장'을 거부하는 김교수가 선택한 '통계와 실증의 진정성에 대한 순진한 믿음'이야 말로 리카도식 폐습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통계와 실증에 대한 믿음 자체도 수사와 주장에서 그리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즉 진정한 리카도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리카도식 폐습에 젖어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