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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 연애란 무엇인가
책들의 풍경 : 연애란 무엇인가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9.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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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끝끝내 연애 아니냐"...상처를 살피는 섬세한 시선들

▲왼쪽부터 김용택, 이윤학, 안도현, 이성복, 허수경 시인. ©

 

 

 

 

 

시인들은 누구나 연애시를 쓴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문학동네 刊)에서 안도현이 “삶이란, 끝끝내 연애 아니냐”라고 말했던 것처럼 연애는 생의 영원한 주제이고 삶은 연애로 지탱해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굳이 남녀 사이라고 못박을 필요도 없고 막연한 ‘연애감정’이라도 좋다. 연애라는 단어와 관념과 複數의 경험들이 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밥먹듯 하는 연애질이고 또 누군가에는 몰래 내리는 눈 같은 것, 그리고 시인 이윤학 같은 이에겐 “담장 위로 핀 개나리, 그 때 그 계집아이, 뛰어가라, 머릿속 노란물이 빠질 때까지”(‘개나리’)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첫사랑일 수도 있다.‘사랑시’와 ‘연애시’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사랑시는 플라토닉의 느낌이 강한데 처절함이 부족하다.

연애시는 실존적이고 육체적이라서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는다. 가을에는 어떤 게 맞을까. 쓸쓸함과 고독이 가을의 정조라고 우긴다면 ‘연애’ 쪽이 맞을 듯하다. 그렇다면 김초혜, 이해인이나 유안진 시인 등은 연애시의 계보에서 제외될 수 있고, “얼골 하나야 손바닥 하나로 폭 가리지만, 그대 생각 호수만 하니 눈감을 밖에”(‘호수’) 같은 정지용의 단아한 표정도 연애라는 카테고리와 썩 부합하지는 않는다. “이화에 월백”하다가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든다는 고전적 구절은 곰곰이 생각하면 환장할만한 병이지만 그 시름 깊음을 가을날의 초입에 길게 다루는 건 무리다. 요즘 ‘연애’를 개념사적으로 훑는 책(‘연애의 시대’(권보드래 지음, 현실문화연구 刊)에서 ‘모던걸’과 ‘뽀이’들이 저지른 색 바랜 분홍빛 사건들도 보여주지만, 신문의 가십란에 머물렀던 그 시절은 그 시절로 남겨두는 게 나을 것 같다.

잔잔한 끌림, 혹은 참혹과 치욕

그렇다면 누가 있을까. 우선 김용택 시인이 떠오른다. 그의 유명한 첫시집 ‘섬진강에서’(창비 刊)에 실린 섬진강 연작들은 섬진강과 그 마을살이에 대한 시인의 절절한 애정표현이다. 겨울에 얼어붙은 강가에 서서 눈을 맞으며 물들이 서로 당겨서 결빙되는 모습과, 그리고 산 아래에 자그마한 마을들의 웅크림을 연결시키면서 “살 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그 아픔”이라 말한다. ‘살’이라는 것은 ‘살짝’을 경상도 식으로 은근히 표현한 것일까, 아니면 ‘살들의 부빔’을 의미할까. 그렇다면 민중들의 아픔과 연결되는 서정시이지만, ‘사∼알’ 당긴다는 느낌으로 읽으면 이것은 아릿한 ‘연애시’가 된다. 농촌에 묻힌 한 청년의 물빛 감수성이 보이는 것이다. 나이 오십이 넘어 ‘연애시집’(마음산책 刊)을 상자한 김 시인은 “연애란 말에서 봄바람에 실려오는 햇풀냄새가 난다”라고 하는데 이런 표현은 다소 김새는 감이 있다. 어른스럽기 때문이다.

연애란 기본적으로 젊은 게 아닐까. 노회하지 않으면서 능숙한 연애를 한다면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휴먼&북스 刊)가 첫손에 꼽힐 듯하다.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는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다”는 부분. ‘사랑의 감옥’에 거처하기를 자처하는 시인은 “골짜기에 퍼붓는 눈처럼, 내 사랑도 어디쯤에서 그칠 것을 믿는다”며 굵은 심줄 같은  연애의 운명을 보여준다. 이런 너와 나의 운명적인 연결에 도달하기까지 연애란 도전과 실패의 연속이다. 장석주는 ‘소금’에서 “사랑은 증오보다 조금 더 아픈 것”이라고 했다. 이는 아픔의 정도를 재보자는 것보다는 아픔의 선명성 차원으로 읽힌다. 그러고 보니 많은 시인들에게 연애는 참혹이고 치욕의 미학이다. 엔간했으면 시인 최승자가 연애의 계절인 가을을 두고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주변인의 초상’)라고 했을까. 그러나 악을 쓰는 것보다 키득거리는 게 더 참혹하다.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집’(문학과지성사 刊)이 그렇다.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은 왠지 두배로 슬프다.

첫시집부터 연애감정에 휩싸여온 이성복 시인의 연애는 치욕의 시적 변용이다. 그것은 유곽과 누이에 대한 끄적거림으로 나타난다. “엘리 엘리, 사랑하는 나의 몸에 못박혀요”라고 말하는 그는 “누이의 잠에 들어오는 그 남자를 싫어”하는 음울한 사내다. 그런 그의 연애는 ‘그 여름의 끝’에서 모호한 대상에 대한 배설로 나타나다가 ‘호랑가시나무의 추억’(이상 문학과지성사 刊)에서 문득 고요해진다. “비오는 날 차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있다는 느낌, 지금 이 노래가,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에 젖는다. 그리고 “누구의 것도 아닌 그 입술에 내 메마른 입술을 포개어본다.”(‘음악’)

기다림 속에서 소멸하는 설레임

연애시의 대부분은 연애가 끝장난 뒤에 씌어진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빈집’)의 기형도가 그랬듯이. 하지만 시작을 말하는 시인도 있다. ‘그리운 102’(문학과지성사 刊)의 원재훈이다.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자꾸자꾸 작아지는 은행나무 잎을 따라, 나도 작아져 저 나뭇가지의 끝 매달린 한 장의 나뭇잎이 된다, 거기에서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넌 누굴 기다리니 넌 누굴 기다리니, 나뭇잎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이건 빗방울들의 소리인 줄도 몰라하면서, 빗방울보다 아니 그 속의 더 작은 물방울보다 작아지는, 내가, 내 삶에 그대가 오는 이렇게 아름다운 한 순간을, 기다려온 것인 줄 몰라한다”(‘은행나무 아래서 그대를 기다리며’)는 그는 가을 초입에 서 있는 남녀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물론 이 설렘은 정말 물방울의 손자보다 더 작아져서 기다림 속에서 소멸될 때가 더 많을 것이다. “희망이란 오래 묵을수록, 하모니카 소리처럼 외로워지는 것, 낡은 속옷 갈아입듯 기어이, 눈발 날린다 체념하라고”한다는 ‘첫눈’의 강윤후 경우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결국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구해 채우는가”(마종기, ‘꿈꾸는 당신’)라고 꿈속에서도 뒤채는 연애의 풍경까지 발견하게 한다.

가을날 읽는 연시들은 마음 속에  은행잎처럼 쌓인다. 올 가을은 시작과 함께 비가 왔다. 시인 이윤학의 가을에도 비가 내린다. 비가 와서 불어난 냇물을 그는 먼저 건너간다. “건너편 그대의 손을 잡아주기 위해서”(‘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말이다. 가을에는 연애가 범람한다. 그 범람하는 연애의 강물을 먼저 건너가서 저 건너편 그대의 손을 어떻게 잡아줄까.

“고인돌처럼 생각에 잠겨 먼데를 본다”(강윤후).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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