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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명 : 변홍철 편집장의 반론에 답한다
해명 : 변홍철 편집장의 반론에 답한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9.10 00:00
  •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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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부족과 오류 인정한다, 하지만...

교수신문 제328호에 게재된 ‘생태담론 비판’ 기사에 대해 녹색평론 측이 반론을 보내왔다. 교수신문의 기사가 ‘착각’과 ‘오독’, ‘불성실한 이해’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예를 들어가며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일리가 있다. 기자는 그 동안 녹색평론에 실린 중요한 글을 많이 읽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매호마다 필요가 있는 부분들은 읽어왔고, 문제가 된 기사에서 비판한 천규석 선생의 ‘쌀과 민주주의’도 전부 읽지는 못했지만 3분의 1 가량은  읽고 비판했다. 단독서평이 아니라 ‘담론비평’이라는 큰 이야기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전부 다 읽기 전에 그 책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을 명확히 내렸기 때문에 다 읽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녹색평론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 라다크를 티베트로 오해하고 가한 비판, 생태환경운동 일부분의 ‘지역이기주의’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측면을, 의미있는 생태환경운동과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서 비판한 실수를 정당화시켜주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튼 교수신문 기사의 세부적인 비판들이 기자의 근거확보 노력 및 정확한 확인절차의 부족 속에서, 그리고 학자들의 견해와 기자의 자의적인 판단에 많이 의존한 채 이뤄졌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런 걸 어느 정도 인식했음에도 글의 논조를 상대방에 대한 배려없이 너무 ‘일방적’인 비판으로 가져갔다는 점, 한살림운동, 사상강좌  등에 대한 부분에서도 경박스러워 보일 수 있는 표현을 한번 더 되삼켰다가 뱉어내지 못했다는 점은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한다. 아무튼 위와 같은 이유에서 녹색평론에 사과드린다. 그리고 지역단위에서 풀뿌리 민주주의와 자치운동에 진정 힘쓰고 있는 실천가, 주민들에게도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드린 점 깊은 사과를 드린다.

녹색평론의 반론을 모두 수긍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재반론을 쓰는 게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해 나중으로 미루겠다. 교수신문 기사의 원래 의도, 그리고 지금도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향후 논의해보려 한다. 다만 교수신문 독자들에게는 좀 변명을 하고 싶다. 독자들에게는 “과연 교수신문이 경박하고 무식하게 행동했는가”의 부분에서 의견을 구하고 싶기 때문이다.

교수신문은 문제의 기사를 쓰기 전에 녹색평론 측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겠다는 의사를 알렸고 변홍철 편집장은 “환영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질문했다. 물론 이 때의 질문은 구체적이지 못했고 주변적인 것들이었다. 변 편집장은 한두 부분에서는  “우리도 느끼고 있다”라며 수용했고, “녹색평론의 서평이 너무 찬사 일색”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편집원칙이 “좋은 책을 널리 소개하는 것”이라 비평적 읽기에 비중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취재를 끝내고 글을 쓰다보니 녹색평론에 대해 너무 비판적인 기사가 돼갔다. 그래서 주요 비판들에 대해 녹색평론에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겠다고 결정했다. 기사의 비판요지(호지·니어링 비판, 한살림운동 부분, 생태 포퓰리즘 부분, 민주주의 부분 등)를 뽑아 상세히 질문지를 작성해 녹색평론에 이메일로 보냈다(김종철 교수의 연락처를 가르쳐주지 않아서 이 방법을 취했다). 그리고 직원에게 질문지를 김종철 선생에게 전달해 달라고 전화했고, 그래서 김 선생이 메일을 확인했고 읽었을 거라는 답변도 받았다. 직원이 하루 정도 기다려보라 했으나 답변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추측했다. 질문지가 너무 논쟁적이었다는 점이 걸렸다. 또한 말도 안 되는 비판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직원에게 질문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으나 잘 모르겠다는 답변을 들었다(이 때 편집장과 통화를 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상황이 이러했고, 이를 근거로 변명을 해본다면 나름대로 ‘대화’와 ‘확인’을 시도했고, 비판기사를 내보내기에 앞서 거쳐야될 절차를 거친 기사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학자들과도 꽤 열심히 토론했고, 자치운동을 하는 활동가와도 여러 면에서 의견을 나눴다. 그렇게 해서 생태담론이 갖는 문제점에 대해 다소 ‘추상적인’ 차원에서나마 확실한 입장과 논지를 가지고 기사를 썼고, 그 기사가 생태담론계에 어떤 자극의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단어들이 좀 거칠고, 문맥이 생략된 부분들도 있고, 비판하다보니 과장이 생겼다는 점을 느꼈지만 심한 정도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생태담론이 상호간에 대화를 하고,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 머리를 지배했던 탓이다. 그래서 기자의 비판이 녹색평론의 그 동안의 노고에까지 그 여파가 미칠 수 있다고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녹색평론의 선구적 실천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여기고 넘긴 것이다.

아무튼 이번 계기로 ‘비판’은 곧 신중함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문제의 기사를 읽고 불쾌하셨을 독자와 이 글을 마땅치 않게 여길 독자께도 사과드린다.

사족 : 마지막으로 변홍철 편집장이 본인과 통화한 걸 메모해서 인용한 부분은 기자가 말한 부분과 다르다. 첫번째 인용부분 "미안하다. 막연한 이미지를 가지고 비판한 게 사실이다"라는 부분은 "막연한 이미지가 작용한 부분도 있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며, 한살림운동과 관련된 두번째 인용부분 "잘못 알고 있었다"는 부분도 기자가 말한 것과 다르다. 기자는 한살림운동이 '녹색평론'의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한살림운동을 모르지 않는다. 그 동안 기사를 쓰면서 한살림에 계시는 생태운동가, 이론가, 바람과물 연구소 관계자들과 많은 통화를 했다. 따라서 기자는 문제의 기사에서 한살림운동이 처음 생기고 그 활동반경을 넓혀나가는데 녹색평론이 물심양면으로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녹색평론의 주요활동"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표현이 정확치 않아 오해가 있을 수 있지만 한살림운동과 녹색평론을 동일집단으로 보고 있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둔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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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민 2004-10-03 21:47:18
비판적 글쓰기를 그동안 해오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모순들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습니다.
아래에 지적하신 말씀은 거의 사실과 일치한다고 봅니다.
좀 쉬고 싶긴 하지만...
그런 결정을 내릴만큼 제 삶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조언해주신 부분들 늘 마음에 새기면서
행동하겠습니다.

시골의사 2004-10-03 06:50:06
강성민 기자님께


기자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바 없이
녹평 독자모임에서 교수신문에 실린 기자님의 기사로 논란이 인다는 글을 보고 여기 와
관련된 그간의 게시글을 읽었습니다.

따로 검색을 해보니 강 기자님이
그간에 기사 대여섯 개 정도 쓴 신입내기도 아니고
상당한 경력의 기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자님은 기자님 스스로 기자의 직분에
자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왠지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번 일을 보며 제가 새삼 느끼는 것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기자일이라는 것이
전혀 진지한 행위가 못된다는 겁니다.

기자 행위의 결과로서 기사의 파급력과 영향력은 엄청난데도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상의 행위는
몹시도 빈번한 마감에 쫓기고
마감 때문에 충분한 취재도 못하고
기사 자체에서는 보다 더 신중하고 아니 신중하다기보다는 정확한
단어선택에도 이르지 못하고
어쩌면 기자 저마다의 보통 이상의 타고난 언어감각에 의지하여
기사를 써내고 있다는 거지요.

기명칼럼을 쓰는 직급 높은 기자가 아닌 한
한국 기자 거의 대개가 그렇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걸 당연시합니다.

사실 언론에 나오는 거의 모든 논쟁적 기사는
이번과 같은 호된 반발을 부닥쳐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많은 독자들은 한국언론의 무책임한 보도에
이미 포기한 심정이라는 것도 알아두셔야 할 듯합니다.
웬만한 비판이나 질책은 무시해 왔던 겁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신문이 신문인 만큼
여러 사람들의 실망과 노여움이 컸던 것 같습니다.

지금 강 기자님은 나름대로 기사가 해악과 피해만 줬다고는
여기고 싶지 않겠지만,
만약 지금 이 순간을
그 기사의 처음 마감 한 시간 전으로 돌려놓는다면
보다 반발이 적은, 그러면서도 기자님 원래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괜찮은 기사로 바꿔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물론 그 한 시간을 위해 지난 며칠의 정신적 홍역이 필요했던 것이지만요.)

그럼에도 딱 한 시간이면, 원래의 의도를 살리면서도
반발소지도 없는 기사로 너끈히 고쳐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기사 글쓰기가 얕은 물 건너기라는 거지요.

기사라는 것 자체의 그런 정체를 아는 이는 비판적 읽기가 습관화돼 있지만,
특히 자기 관심 분야라면 더 그렇습니다.
(저는 의학 건강 관련 기사에는 오도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강 기자님이나 교수신문에 대한 무의식적인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기자님의 기사를 받아들였을 겁니다.
또는 기존의 간사한 앎이 있는 분이라면
아이고 듣고 싶었던 소리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런 생각까지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이래? 박모 교수님은 왜 이런 말을 했지?
다시 오래된 미래를 읽어봐야겠군,
이렇게 고민할 독자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
이미 고정된 감정이입을 유지한 채 쓱 읽고 마는 거죠.

이런 우리 사회의 정신적 핍박의 리듬은 어디서 오느냐.
노동 생산 리듬에서 온다고 봅니다.
자연의 리듬이 아닌 근대화 이후 현대문명의 리듬 말입니다.
그것이 천박함과 조급증을 낳는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한 시간이면 싹 고칠 수 있는 강 기자님의 기사 역시
그 리듬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강 기자님이야말로 이 한국사회의 피해자가 아닐까요.

다른 리듬에 주목하자, 그런데 그 리듬이 새로 발명해야 할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땅에서 떨어지고 솟아날 것도 아닌,
우리의 오래된 미래에 풍부하게 존재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눈을 돌려 이 세상 만물을 사랑으로 경영하는
대문자 존재자의 리듬, 그것의 순환생리, 이런 사고와 생활의 과감한 전환,
이것이 제가 아는한 녹색평론의 반복된 주장이었습니다.

강 기자님. 피곤하시지요?
아니면 그간의 논쟁 속에서 공격호르몬이 분비되어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부정적인 쾌감, 마감증후군 속에서 피곤함도 모르시나요?

그러나 의사 입장에서 좀 쉬시기를 권합니다.
가까운 시골에서 한 두어 달 쉬면서
이 모든 일들의 의미를 돌아보시기를 권합니다.

새벽에 썼습니다.

채송아 2004-10-02 14:47:55
이번 기사에 따른 논의가 녹색평론과 현재 우리나라의 생태담론 - 단지 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삶에 투영되어 어떻게 실천하고, 크고 작은 변화들을 일구어 가고 있는지, 기자님 스스로 구체적이고 진지하게 경험하는 계기가 되시길 빕니다.

'기자'라는 직업과 '교수신문'이라는 위상 때문에, 매우 불편한 입장이시겠지만, 그 모든 객관적 책임과 권리를 떠나, 기자님의 한 개인이 변화하고 성찰하시기를,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주변의 '지식인'들과도 그 경험과 성찰을 진지하게 나누어보시길 진실한 마음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그 책임과 권리로 돌아오셨을 때 좀더 성실한 기사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투를 빕니다.

길가다가 2004-10-01 20:11:11
먼저 고백한다. 교수신문의 논쟁적 글을 거칠게 겨우 통독했다. 듬성듬성 몇 줄씩 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뭔 말인지 충분히 알겠다. 적어도 문자상의 주장이 원지를 알겠다. 그런 정도의 내 이해를 가지고 나는 여기서 말한다. 이런 내가 잘못이거나 그런적이 없는 양식적 지식은인 비록 익명으로밖에 글을 쓰지 못하는 나이지만 나에게 얼마든지 돌을 던져라. 마음속 아프게 맞겠다.
먼저... 논쟁의 과정이 매우 비열하고 비생태적이라는 점을 나는 가장 먼저 말하련다. 내 알기로 생태는 생명의 다른꼴 이름이렸다. 리플 글을 단 사람들 보시라. 자신의 저급한 비아냥에 어떤 생명력이 담겼는가를.... 말 그대로 저급의 비난과 비아냥만 있다. 그런 정신머리로는 진정한 생태를 말할 자격이 없다. 단호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생태라는 못된 의미의 정치만 있을 뿐이다. 마치 고구려재단의 성립이 그들 끼리의 먹이감을 낚아채는 생존의 한 취득이었듯이... 그로 말미암은 역사의 깊고 그늘진 골짜기를 두번 다시 저들에게, 그리고 우리 내부의 적들에게 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중장기적 안목의 동북아재단쯤으로 설정되었어야 옳았듯이...
나는 강성민 기자의 내면을 잘 모른다. 허나 나는 매체란매체가 다 저들끼리의 상업주의에 경쟁적으로 찌들어가는 즈음, 그나마 건강한 논쟁과, 비록 전공자 몇이서 읽을망정 깊은 학술적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교수신문의.... 자칭 친구이자 격려자 남고 싶은 사람으로서 이번 논쟁의 진행이 매우 못마땅하고 한심스러워서 어쩌질 못하겠다. 글과 말의 앞뒤를 적당히 그러나 매우 서툴게 아귀를 맞추어서 비난하는 일을 당당한 논리와 양식이라고 감히.......말하지 말자고.....
나는 강원도에서 활동하는 꽤 여럿의 자칭 이론을 갖춘 현장 생태주의자들을 알고 있다. 이름을 대면 대충 알만한 그들이다. 그들의 노력이 만만치 않음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생존력에 즈음 경탄하는 중이다. 왜? 생태라는 원줄기를 바탕으로 갖은 곁가지를 만들고 거기에 기생하는 그들의 정치적 생존력이 가히 놀랍기 때문이다. 그럴때 나는 직설적으로 생명과 웰빙을 팔아 장사하는 장사치들이 차라리 당당하다고 생각한다. 아 저들의 상업적 생존적 생태주의를 지적하는 일이 이토록 비난맏을 일이었던가 말이다. 반성하시라 그리고 진정으로 겸손하시라.... 생태주의자들이여!! 진정한 생명은 이론 보다 먼저 사람냄새나는 그런 겸양과 겸손과 끝없는 반성에서 부터 온다.
서툰 돌팔매는 적들의 방법이다. 나는 이론을 모른다. 용기가 회귀적 생태주의자도 못된다. 이쯤에서 제로성장이라도 진행될 수 있다면... 그게 나의 생태에 대한 이해의 전부이다.

강성민 2004-10-01 18:55:35
길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북새통에 서평원고를 넘긴 날은 9월 13일이 아니라 9월 17일입니다. 9월 13일은 북새통 김점기 기자와 다른 용건으로 메일을 주고받았습니다. 이 부분을 북새통에 좀전에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태담론비판> 기사를 쓴 것은 9월 14일입니다.
9월 20일자 신문을 9월 15일 밤에 인쇄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명확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저는 마감을 끝내고 천병석 선생의 책을 좀더 천천히 검토해봤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근대 이후의 민주주의 개념을 과거시대에 대입시키고, 과거의 각종 농업문화를 현대의 반면교사로 삼아야한다는 식의 주장들은 별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농업과 농업사에 대해서는 전문가이지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평범한(보수신문들이 만들어놓은 논의구도) 수준에 머무르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무슨 PD수첩 취재하듯이 계속 기자의 시각과 불성실 등을 문제삼는 변홍철 편집장에게 이런 외부적인 것을 가지고 계속 따지지 마시고... 제가 기사에서 제기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의견을 보여주시길 기대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내 주변의 많은 지식인들은 제가 쓴 담론비평의 기사가 썩 잘된 기사는 아니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 차분하게 반론을 써볼 만한 시의성있는 문제제기가 있다고 하더군요...

녹색평론 홈페이지에는 게시판이 없던데... 게시판을 하나 만드시는 게 어떨지 제안을 드립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저희 신문 홈페이지에서 계속 하는 게 생산적일 것 같지 않네요. 아니면 녹색평론 측에서 저에게 지면을 한번 주시면 성심성의껏 녹색평론에 대한 저의 추가적인 의견을 한번 개진해보고 싶기도 합니다. 그 때는 정말 공부 많이 해서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녹색평론을 읽는 진짜독자들과 지식인들에 대한 심층취재로 정말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아니면 녹색평론 측에서 자체적으로 그런 기획을 한번 해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