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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비평_‘장르문학’ 담론의 허구성
담론비평_‘장르문학’ 담론의 허구성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9.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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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목적’과 ‘윤리성’ 문제부터 짚어라

문학의 침체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수축된 나머지 자리를 평전류와 판타지 같은 장르문학이 채우고 있다. 물론 상업적 성공에 근거한 얘기지만,  SF, 추리, 호러, 로맨스, 무협, 판타지 등 인터넷이라는 ‘뒷골목’에서 칼을 갈아 내공을 쌓은 장르작가들이 늘고 있고, 이에 대한 학술적 연구도 이뤄지고 있다. 나아가 우리시대의 ‘문학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던져지는 분위기다. 이런 시점에 계간 ‘문학과사회’가을호와 계간 ‘북페뎀’ 여름호가 준비한 특집 ‘장르문학’은 주목을 끈다.

대중과 본격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양방향에서 그렇다. 김탁환의 ‘방각본 살인사건’ 등 재미있으면서도 지적 탐구가 뛰어난 장르문학들이 실제로 생겨나고 있다. 이들의 신선함은 했던 얘기 반복하는 요즘 순문학의 무기력함에 일침을 놓기에 충분하다. 그 반대쪽에서는 본격문학의 급격한 장르화가 놓인다.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나오는 소설들은 어딘가 쌍둥이들이라는 느낌을 준다. 왠지 음울한 주인공, 부부간 갈등, 심리적 혼란 등은 빠지지 않는 코드들이다. 한마디로 소설이 상투화됐다는 것이다.

두 계간지의 특집은 이런 배경과 질문을 깔고 있다. 소설가 김영하 씨는 “장르문학적 특징이 없는 게 본격문학”이라는 역전된 정의를 내린다. 작가의 세계관과 아름다운 문체, 실존적 고뇌 등이 본격문학의 특징이 아니라, 장르문학에서 배제된 게 본격문학이라는 말은 소설가의 자기반영적 발언으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좌담자들은 장르적 문법을 숙지함으로써 오히려 순문학 속의 양식화된 코드들을 추방하고 새로운 무질서를 실험하자는 데 의견일치를 본다.

이는 문학의 문제만도 아니다. 영화에서도 홍상수가 유행했을 때 대학 영화과에서 모두 카메라를 들고 여관방을 잡아 무기력한 ‘일상’을 찍었고,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뜨자 모두들 사람을 죽이고 팔을 자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영화평론가 김봉석 씨는 예술 전반의 ‘모방’의 심각성을 지적한다.

그런데 과연 이게 모방의 문제일까. 사실 미메시스는 문학의 고유한 충동이지만 요즈음의 ‘모방’들은 ‘팬덤문화’와 가깝다.공통적인 것을 좇는 사람들의 독특한 이 폐쇄적인 특성은, 홍상수와 박찬욱에 대한 열광에서 잘 나타난다.

사실 팬덤에 기초한 장르문학은 근대문학이 다루지 않았던 비이성의 어두운 측면들을 다루는 데서 그 매력을 발산해왔다. 하지만 이는 초기의 전위적 성격을 잃고 이젠 본능에 대한 쾌락적 긍정에 머물고 있다. 본능적 코드의 공유는 그 확산속도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거기엔 도덕의 개입이 없다. 목적성과 건강성 같은 것들은 ‘노땅’으로 취급된다. 이래선 곤란하다.

그런데 문학이 과연 이런 대안없는 탈-모던과 모던의 짬뽕을 어떤 식으로 논의해서 미래를 모색하자는 것일까. 아마 이들 잡지들은 ‘팩트’를 보기보다는 ‘이미지’들 사이를 세련되게 유영하면서 또 다른 환각적인 ‘문학성’의 길을 안이하게  추구하려는 듯하다. 좌담이나 특집에 실린 글들이 모두 고백하는 것은 취향이나 라이프스타일 속에서의 문학의 역할이다. 삶의 액세서리로서의 문학, 도구로서의 문학이라는 인식들이 만연한데, 전부 문학의 한쪽 측면만 보고 있다. 이른바 대세를 따르고 있다.

장르문학이 가능한 토대에 대한 고찰 빠져

사실 추리, 로맨스 등과의 첫만남, 애정행각을 회고하는 ‘북페뎀’의 열편에 가까운 글들은 자신이 경험한 그대로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글들은 눈에 띄게 추억을 재구성하고 있으며, 여기엔 장르의 합리화라는 기제가 작용하고 있다. 쉽게 말해 청탁의도에 맞춰 글을 쓰다보니 글들이 모두 똑같아 졌다.

하지만 이 글들은 서구의 빼어난 장르문학의 수작들을 우리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최측의 소망은 들어주지 못한다.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장르’라는 컨셉트는 문화적 식민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모델’로 설정해놓은 것들은 모두 어슐러 르 귄 같은 서구의 장르고전들이다.

▲오늘날 문학을 성찰하기 위해 선택한 ‘장르’라는 컨셉트는 허구적인 측면이 많다. 그 만큼 그 생명력은 길지못할 것이다. ©
이번 특집에서는 이런 고전들이 서구사회가 성취한 높은 인문주의와 과학적 교양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SF 분야를 보더라도 과학에 대한 서구사회 대중들의 관심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다. 따라서 양질의 SF문학의 확산은 과학의 대중화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물론 과학대중화의 길은 현 상황에서 매우 멀다. 판타지도 마찬가지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는 ‘그들의 신화’를 상품화한 것이다. 현실을 압도하는 ‘서사시’를 만드는 일 또한 보통 인문학적 교양으로는 힘들다. 요즘 추리소설이 읽히는 추세도 ‘애거서 크리스티’가 유행했을 때와는 다르다. ‘다빈치코드’, ‘단테클럽’ 등은 사건의 논리적 해결 과정에 숨겨져 있는 보물 같은 지식들의 향연에 그 묘미가 있으며, 이는 또한 박학함을 필요로 한다. 수요와 공급 양 측면에서 장르문학의 미래는 매우 어둡다. 두 계간지의 특집은 확실한 상업주의도 아니고 인문학적 성찰도 아닌 ‘현황’이라는 이름 아래 어정쩡한 포즈만 취하고 말았다.

‘북페뎀’에 ‘왜 지금 판타지인가’를 쓴 ‘문학사상’ 편집주간 김성곤 서울대 교수(영문학)의 글은 전체적으로 볼 때 너무 표피적 관찰에 머물고 있다. 그는 지금 판타지가 유행하는 이유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더욱 확실하기 때문이 아닐까.

‘장르문학’ 담론은 그 생명이 짧아보인다. 장르문학은 아직 자생화의 길이 멀고,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만남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문학 속의 장르적인 것들에 대해 좀더 현실적인 논의가 필요할 듯하다.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이 이런저런 장르적인 코드를 갖고 있으며, 그런 것들을 세련된 용어로 포장하지 말고 느낀 그대로 지적해주는 비평적 용기와 세심한 읽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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