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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내’는 정신과 몸 포괄하는 전일적 개념 돼야
‘소내’는 정신과 몸 포괄하는 전일적 개념 돼야
  • 김수이 경희대
  • 승인 2004.09.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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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반론_김진석 교수의 해명(교수신문 327호)에 답한다

김진석의 문학비평집 ‘소내에서 소외로’에 대한 필자의 서평에 대한 저자의 반론(혹은 해명)을 잘 읽었다. 필자 역시 짧은 글의 제약 상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한 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한 번 더 펜을 들고자 한다.


먼저, 이 글은 김진석의 문학비평의 심화와 확대에 기여하는 ‘생산적인’ 제안을 하는 데 목적이 있음을 밝혀 둔다. 김진석이 처음 ‘포월’과 ‘소내’의 개념을 창안했을 때부터 애독자였던 필자는 자신만의 개념과 學을 소유한 철학자인 그에게 존경심을 품어 왔다. 때문에 문학비평가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문학비평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도, 김진석이 오랜 세월 축적한 철학적 역량을 문학비평으로 변주한 결과가 의미 있는 것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김진석은 해명의 글에서 “아직 책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소내’ 개념의 필요한 역사사회적 맥락에 대해서 나는 이미 다수의 글을 썼는데, 그 글을 읽지 않고 이번 평론집만 본다면 그 개념이 아직 미흡하다고 느낄 듯하다”고 하였다. ‘소내’ 개념을 미학과 사상에 적용한 책이 계속 출판될 것이라는 점도 명시해 놓았다. 그런데 이번 평론집은 분명 한 권의 독립된 문학평론집이므로, 문학비평의 측면에서 논의를 더 구체화해보겠다.


김진석이 ‘소내’ 개념의 사회역사적 맥락에 대해 다수의 글을 쓴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그의 문학비평에는 그 맥락이 결여되어 있기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나타난다. ‘소내’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작가들에 대한 비평문이 텍스트 자체에 대한 분석과 해석의 차원에 머무른다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이들 작품의 미학적 완성도나 역사적?문학사적 가치 평가는 찾아보기가 어려워진다. 이는 특히 김기택, 이성복, 오규원, 정현종, 황지우에 대한 시론에서 두드러지며,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에 대한 결정론적 선택 및 편애의 문제와 직결된다. 문학비평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작품의 문학성과 문학사적 공과에 대한 ‘가치 평가’라는 점을 생각할 때 숙고되어야 할 부분이다.


반면, ‘소내의 비평’은 그 개념에 위배되는 작가들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으로 일관한다. 심지어 김진석의 비평문에서 역사적, 문학사적 가치 평가는 이들에게만 적용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글들은 문체와 어조도 전자의 글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서정주, 김용택에 대한 글이 대표적인 예로, 특히 서정주에 대해서는 그의 문학(사)적 공적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타당한 처사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김진석의 ‘소내의 비평’이 문학비평으로서의 타당성과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가치 평가 부분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특정 대상에 친화력을 갖는 비평이 아닌, 한국문학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보편성 있는 비평이 되기 위해서는 이 점은 필수적인 항목이다. 더불어, ‘소내의 비평’은 기존의 문학비평의 가치 평가와는 다른, 차별성 있는 결론을 제출해야 한다. ‘소내’를 문학적으로 적용한 결과가 기존의 문학비평의 결과와 유사하거나 변별성이 없다면 그 수고의 의미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한편, 김진석은 ‘소내’ 개념이 기존의 문학비평의 ‘내면화’와 유사하다는 지적에 대해 “소내는 심리적 내면화보다는 차라리 몸의 체험과 훈련을 추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소내’ 개념에는 몸과 정신(의식/무의식)의 이분법이 작용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실제로, “시에서 고통과 치욕은 의식과 무의식의 문제라기보다는 몸의 문제이다”(64쪽)라는 그의 비평의 한 구절에서도 단적으로 암시된다. 같은 맥락에서 김진석은 소내와 소외 역시 대립적인 관계로 상정해 두고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소내’는 ‘소외’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김진석의 개념을 빌어 말하자면, 소외를 소내하면서 포월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소내’ 개념은 정신의 행위를 몸의 물리적인 활동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행위와 몸의 활동이 분리될 수 없음을 증명하는 ‘전일적인’ 개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그의 비평이 몸의 물리적인 활동이 가시화된 작품들에 집중하는 문제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또한 김진석이 이의를 제기하고자 하는, “‘소외’를 현대적 인간의 존재조건으로 삼는 모든 사상과 문예비평”은 그 소외에 함몰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의 문학비평은 ‘소외’라는 제로 혹은 마이너스의 에너지를 현대인의 삶의 역설적인 원동력으로 삼고자 한다. 최근 우리 문학비평에서 활발하게 논의된, 우리 시의 미학의 초점이 ‘동일성의 미학’에서 ‘반동일성 혹은 타자성의 미학’으로 이행되었다는 진단은 이를 반증한다.  


김진석의 ‘소내의 비평’의 열쇠는 ‘소내’를 몸의 변화와 활동을 다루는 물리학적 개념으로 한정시키지 말고, 이를 기존의 비평이 탐구한 의식/무의식적 정신 활동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심화 확대시키는 데 있다. 때로, 차별성과 새로움의 욕망은 어느새 기존의 것과 (대칭적으로) 닮아 있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김진석의 ‘소내의 비평’이 이 함정을 현명하게 피해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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