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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疎內는 내면의 소멸이다"
"疎內는 내면의 소멸이다"
  • 김진석 / 인하대 철학
  • 승인 2004.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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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 김수이 씨의 서평(교수신문 326호)에 답한다

본인의 문학평론집 ‘소외에서 소내로’에 대한 김수이의 서평을 잘 읽어보았다. 관심을 갖고 쓴 서평에 대해 평자에게 감사드린다. 서평자는 몇 가지 점에서 비판적인 이의를 제기하였는데, 내가 보기에 그에 대해서는 반론보다는 차라리 설명과 해명이 필요한 듯하다. 제기된 지적에 반론을 피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평자의 지적의 큰 부분이 나의 평론집에 고유한 어떤 성격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의 평론작업은 사상적이고 개념적인 작업의 연장선에서 혹은 그 둘이 겹치는 영역에서 이뤄졌다. ‘소내’를 축으로 삼은 이 작업은 1990년대 초부터 해왔던 ‘초월에서 포월로’와 거의 동시에(1995년부터) 이루어졌는데, 여기서 ‘疎內’라는 개념은 단순히 문학영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지만, 또 동시에 미학 영역을 대상으로 삼았었다(내년 초 미학영역을 대상으로 삼은 ‘소외에서 소내로’ 2권이, 그 후 사상을 대상으로 한 3권이 출간될 것이다).

‘소내’ 개념은 종결이 아니라 시작단계

왜 이런 개념 작업이 필요했을까. 1990년대 초 ‘탈의 놀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면서 ‘脫’의 관점을 주제화하기도 했지만, 문화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한국적 개념들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적 개념을 만들고 사용하는 일은 아마도 돌쌓기 혹은 축대 쌓기에 비유될 수 있을 듯하다. 커다란 돌로 제방을 쌓거나 축대를 쌓으면, 우리는 호수를 만들거나 집을 지을 수 있다. 그런 기초 작업으로서의 개념쌓기가 필요한 것은, 지식인들이 한국적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말은 크게 하면서도 정작 구체적인 작업은 하지 않거나 구체적인 작업은 인정하지도 않는 일이 지난 세기에 왕왕 벌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 혼자 중뿔나게 말을 만든다고 새로운 개념이 생산적인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개념의 유통은 그 자체로 사회적인 공동 작업이기 때문이다. 평자는 “가장 큰 문제는 ‘소내’라는 개념이 역사?사회적 맥락과 미학적 범주를 포괄하기에는 (아직까지는) 미흡하다”라고 했는데, 맞다. 이 작업은 종결된 것이 아니다.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아직 책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소내’ 개념의 필요한 역사?사회적 맥락에 대해서 나는 이미 다수의 글을 썼는데, 그 글을 읽지 않고 이번 평론집만 본다면 그 개념이 아직 미흡하다고 느낄 듯하다.


또 평자는 내가 초월성의 관점에서 한국문학비평의 저간의 작업에 대해 다소 성급한 단정을 내린다고 했는데, 아마 큰 돌을 깎고 그 돌을 쌓듯이 개념을 적용하는 하는 과정에서 그런 일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본적인 개념 작업의 위험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판적인 작업의 경우 나는 되도록 구체적인 작가나 텍스트를 예로 들어 말했다. 평자가 지적한 구절도 한용운의 ‘님’에 대해 과도하게 초월적 해석을 한 김우창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나왔음을 환기시키고 싶다. 현대시사에서 초월성 대신에 역사와 현실에 대한 강박이 적지 않은 경우에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에도, 나는 동의할 수 있다. 평자는 내가 마치 근거없이 김수영의 반초월성을 고평하는 것처럼 말했는데, 나는 우리가 그의 역사적 리얼리즘을 해석하면서도 “자연을 보면서도 사회를 상징해야 한다는 강박”(281쪽)에서는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소내’와 ‘심리적 내면화’의 차이

그리고 ‘소내’ 개념에 대해 평자는 그것이 물리학적 개념을 동원해 과학적으로 설명해내는 장점은 있지만 기존의 ‘내면화’ 개념과 유사하다고 했는데, 이 점은 오해에서 기인한다. ‘소내하기’라는 것은 물론 세상에서의 체험을 내면적으로 성찰하고, 존재의 분열을 내면의 분열로 인식하는 과정을 전제하고 거기에서 출발하기는 한다. 그러나 다음 단계에서 ‘소내’하는 과정은 심리적 차원에서의 내면화와 결정적으로 갈라지고 그것과 충돌하기까지 한다. ‘내면화’ 개념은 이미 주관주의적 심리주의가 초래한 여러 문제들에 둘러싸여 있고 눌려 있기 때문이다. ‘소내’는 바로 그 점에서 내면적 의미화인 함축이나 내포에 대해 거리를 취한다. 심리적 내면화보다는 차라리 몸의 체험과 훈련을 추구한다(이성복의 시에 대한 해석에서 강조되었다). 그리고 기호의 차원에서는, 내면적 내포보다는 ‘外示’에 주의를 기울인다. ‘외시’는 모든 기호가 인간 심리에 대해 유지하는 ‘외면성’에 주의를 기울이고 강조한다. 이 점은 비평을 통해 설명했고, 더 나아가 이미 발표된 회화와 사진 이미지에 대한 글에서 상술했다. 이 점에서 ‘소내’는 내면으로 숨어드는 대신, 숨어들 내면이 없어지면서 안이 밖이 되는 과정을 말한다.


무엇보다도 ‘소내’ 개념은 역사적 맥락에서 ‘소외’를 현대적 인간의 존재조건으로 삼는 모든 사상과 문예비평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소외’ 개념은 출발 당시의 철학적 함축성에도 불구하고 너무 관념적이며, 특히 그것에 의존하는 비평은 진부한 투정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폭력과 권력이 충돌하는 분열적 갈등 상황에서 단순한 ‘내면적’ 성찰이나 고백은 보수적 낭만주의나 서정주의로 퇴행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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