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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1] 고흐와 드레퓌스를 위해 쓰고 자본과 권력의 협잡에 맞서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1] 고흐와 드레퓌스를 위해 쓰고 자본과 권력의 협잡에 맞서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4.1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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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보 미르보
옥타브 미르보(Octave Mirbeau, 1848~1917)
옥타브 미르보(Octave Mirbeau, 1848~1917)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가 죽기 직전 그에 대한 최초의 평론을 쓴 사람이 19세기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작가이자 평론가인 옥타브 미르보(Octave Mirbeau, 1848~1917)였다. 그 평론은 극찬에 가까운 것이었기에 이를 읽은 반 고흐가 이제 자신의 그림이 처음으로 인정을 받은 것에 그렇게도 기뻐했는데 자살을 했다고 하다니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서 자살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담은 『내 친구 빈센트』를 썼다. 2006년에 그 책이 나온 뒤 반 고흐의 자살설에 의문을 표하는 책들이 다수 나왔다.

그런데 반 고흐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함께 미르보의 존재도 사라졌다. 그리고 반 고흐처럼 죽고 한참 뒤에, 그보다 훨씬 뒤인 1970년대에 와서야 미르보가 재발견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작품으로는 최초로 소설 『어느 하녀의 일기』의 번역본이 2015년에 나왔다. 원작이 1900년에 나왔으니 115년 만에 번역된 셈이다. 같은 해에 나온 영화가 없었더라도 소설이 번역되었을지는 의문이다. 그 작품의 영화화는 이미 1916년에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뒤 1946년 장 르누아르, 1964년 루이스 부뉴엘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위치한 소도시 레말라르(Remard)에서 답답한 어린 시절을 보낸 미르보는 인근에 있는 반느(Vannes)의 예수회 기숙 중학교에 다니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성적도 나빠 4년 후 석연찮은 이유로 퇴학을 당한다. 15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공증인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다가 1870년에 징집되어 충격적인 전쟁 경험도 한다. 제대 후 2년이 지난 뒤 보나파르트주의자의 리더이자 전직 하원의원이었던 뒤게 드 라 포콘느리(Dugue de La Fauconnerie)의 비서로 일하다가 뒤게의 소개로 왕당파 홍보기관인 ‘로르드르 드 파리’(L’odre de Paris)에 들어가 ‘노동계급’으로서의 글쓰기를 시작하지만 당시 그의 행적은 뒤에 강한 죄의식으로 남는다. 뒤게를 비롯한 유력자들의 ‘시종’이자 왕당파부터 반유대파에 이르는 타락한 기자로서의 ‘매춘’ 장단편 소설들의 대필자였기 때문이었다.

 

고통 받는 예술가, 노동자, 피해자의 삶을 묘파

 

1884년, 36세가 되어서야 부도덕한 여성과의 파행적인 관계를 계기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브르타뉴 지방의 끄트머리 마을로 재충전을 하러 떠난다. 이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속죄로서의 글쓰기로 사회정의와 천재적 예술가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 최초의 저술인 단편집인 『내 초가집으로부터의 편지들(Lerrres ettres de ma Chaumiere)』은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지역을 배경으로, 알퐁스 도데의 작품세계에 담긴 따뜻함과는 대조적인 분위기를 담으며, 인간과 사회의 지극히 어두운 면을 그린다. 뒤이어 발표되는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세 편의 장편들이 같은 경향을 더 견고히 묘사한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으로 쓴 『쥘 신부(L’abee Jiles)』(1888)에서 사회적 압제와 교회의 부패에 온몸으로 맞서 대항하는 가톨릭 신부의 심리를 깊게 묘사한다. 그리고 『세바스티앙 록(Sebastien Roch)』(1890)는 예수회중학교의 신부가 학생을 성폭행한 사건을 소재로 삼아 아이의 순결한 영혼의 죽음을 격앙된 감정으로 적는다. 이러한 저작들과 함께 가명으로 여러 신문들에 기고하여 오귀스트 로댕,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폴 세잔, 폴 고갱, 반 고흐, 카미유 클로델, 아리스티드 마이욜, 모리스 유트릴로 등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동시에 아나키스트로서 불랑제 장군파, 민족주의자, 식민지 정책, 군부정책 그리고 보편타당을 앞세워 개성을 말살하고 개개인의 우둔화를 계획하는 ‘나쁜 목동’들인 권력의 시녀들을 척결하는데 앞장선다.

 

『내 초가집으로부터의 편지들(Lerrres ettres de ma Chaumiere)』
미르보 최초의 저술인 『내 초가집으로부터의 편지들(Lerrres ettres de ma Chaumiere)』

 

1890년대에는 작가로서나 남편으로서 딜레마에 빠져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지만 실존주의를 방불하게 하는 소설인 『하늘 속에(Dans le ciel)』(1892-1893)에서-당시 미르보가 발견한 반 고흐로부터 영감을 얻은-고통 받는 예술가를 묘사한다. 그리고 졸라의 노동소설 『제르미날(Germinal)』과 같은 주제의 희곡 『나쁜 목동들(Les Mauvais Bergers)』에서 노동자계층의 비극을 그리기도 한다.

 

드레퓌스 사건, 미르보를 세상으로 이끌어내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미르보를 신경쇠약으로부터 벗어나서 의미 있는 사회활동에 참여하게 한 계기는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에밀 졸라가 이 사건에 개입한지 이틀만인 1897년 11월 28일부터 그는 특유의 관대함과 함께 드레퓌스 옹호에 참여한다. 지식인들의 두 번째 서명을 위한 선언문을 쓰는 한편, 매일 졸라의 재판에 참석하고, 사재를 털어 졸라에게 부과된 벌금지불에 사용한다. 또한 파리와 지방에서 열린 수많은 드레퓌스 옹호자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와중에 노동자와 지식인 계층들의 참여를 호소하는 글을 쓰고, 가상의 인터뷰들을 지어내 민족주의자와 교권주의자 그리고 반유대주의자들을 공격하여 졸라에게 ‘정의의 사도’라고 찬양되었다.

이어 당시의 노예제도인 하인 고용을 비난하는 동시에 부르주아 계급의 치부를 드러내는 『어느 하녀의 일기』(1900)를 발표한다. 하녀 셀레스틴의 기구한 삶을 통해 19세기 말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풍속, 부르주아의 탐욕과 위선, 성적 타락과 방종은 물론, 하층 계급의 비참한 노동 조건과 신산한 삶, 국론을 분열시킨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싼 반유대주의와 애국주의의 광풍까지 그려낸 작품으로 일기라는 형식이지만 과거 회상 장면이 중간에 자주 삽입되어 과거와 현재가 혼재되어 서술된다. 그 중 한 구절을 보자.

 

"가난한 사람들이란, 삶의 수확물과 즐거움의 수확물을 키우는 인간 비료나 다름없으며, 부자들은 이 수확물을 추수하여 너무나 잔인하게 우리에게 악용한다. 더 이상 노예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주장한다. 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억지다. 하인들이 노예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노예 제도가 정신적 비열함, 필연적 타락, 증오를 낳는 반항심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노예 제도는 지금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인들은 악덕을 주인에게 배운다. 순수하고 순진한 상태에서 하인 일을 시작하는 그들은 사람을 타락시키는 습관과 접촉하면서 금세 타락하게 된다. 그들은 오직 악덕만을 보고, 악덕만을 호흡하고, 악덕만을 만진다."(이재형 옮김, 책세상, 367~368쪽)

 

 

53년 뒤 아나키스트 계몽가의 재발견

 

그리고 무식한 졸부들을 비웃고 금전만능주의의 폐해를 고발하는 희곡 『사업은 사업이다(Les affaires sont les affaires)』(1903)를 발표해 성공을 거둔다. 그 뒤 병으로 고생하다가 1914년에 터진 1차 대전은 늘 전쟁의 추악함을 고발해왔고 프랑스-독일간의 우호를 주장하던 평화주의자인 그를 절망하게 하여 69번째 생일인 1917년 2월 16일에 사망한다.

사후 오랫동안 망각된 그는 1970년에 이르러 재발견된다. 참여적 작가의 원형이며 아나키스트이자 개인주의자였던 그는 국민을 소외시키고 억압하고 숨을 끊어놓던 인간 부류들과 제도들의 실체를 밝히는 데 앞섰던 위대한 계몽가였다. 그는 의식을 마비시키고 거짓되고 축소된 비전을 삶과 사회에 강제하는 부르주아 계층과 자본주의 경제체제, 그리고 주류 이데올로기와 전통 문학형식들에 맞서서 투쟁했다. 협잡을 일삼는 정치적 선동꾼, 주식시장의 도적들인 투기꾼과 책략가들, 상공업계의 탐욕스러운 사업가들, 법의 이름으로 부당한 억압을 강요하는 근엄한 도덕주의자들을 그는 비난했다. 또한 인간의 영혼을 화석으로 만드는 종교인들, 겉모습만 번드르르한 예술가이며 문학가들, 돈에 좌우되고 마취성 강한 언론에 종사하는 어릿광대들과 공갈꾼들도 비판했다.

서민의 불행으로 치부를 하는, 인정과 예술적 감성과 개인적 사고능력이 부재하는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도덕적이고 지적 안락을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할, 단단히 뿌리내린 거칠 것 없는 양심을 가지고 굳건히 자리 잡은 사회는 빈사상태였고, 모든 것이 올바른 방향과는 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른 한편, 민주적 혹은 공화적이라는 허울아래 부끄러움을 모르는 소수 권력자들이 무기력한 상태에 놓인 다수를 갈취하고, 억누르며, 소외시키고, 훼손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예술적 재능을 평준화하고, 보편적인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사람과 사물, 재능과 명예를 수요와 공급의 시장논리가 적용되는 천박한 상품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인간적 가치가 사라진 폐허 위로 신전이 세워졌고, 그 곳에서 자본주의 신이 온 세상을 제 손아귀에 넣고는, 고문의 뜰’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특히 현실주의라고 자처하는 소설 양식을 매장하는 데에 앞장섰고, 자연주의, 아카데미즘, 상징주의를 거부하며 인상주의와 표현주의의 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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