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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한국의 김우창 인식론 문제있다
진단:한국의 김우창 인식론 문제있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9.10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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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론주의’가 비벼온 큰 언덕…학문학적 관점에서 재평가 필요

편집자주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는 한국 지성계에서 가장 장중한 아우라를 거느린 사상가로 평가받아 왔다. 그는 영문학자로서 국문학 작품들에 대한 비평적 활동을 통해 국문학계의 민족주의적 경향과 낭만주의적 경향을 뛰어넘는 지성적 문학담론을 창출했고, 문학과 철학을 오가는 독특한 학문스타일로 묵직한 인문학적 에세이들을 써왔다.
동시에 그는 ‘보편성’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메를로 퐁티에게서 빌어온 ‘심미적 이성’으로 구체적인 정치와 생활의 세계를 일관되게 통찰왔다.김우창이 열어놓은 사유의 지평은 후학들에게 이론적 자양분을 제공하고 학문하는 방법론 차원에서 많은 것을 시사해왔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사유와 방법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현실을 압도하는 ‘논리의 성채’ 속에서 안주하는 나쁜 담론적 습관을 만들어오기도 했다. 또한 서구이론에 대한 김우창의 열린 태도와 자유로운 논평도, 후학들에게 온전히 수용되지 못한채 서구의존적 글쓰기에 면죄부를 씌어주는 상황을 빚기도 했다. 이제 김우창에 대한 한국의 찬사와 존경의 표현은더이상 그에 대한 올바른 학문적 배려가 아니며, 오늘날 학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냉철하게객관적 입장에서, 김우창이라는 텍스트를 살펴보고, 비판적으로 넘어설 필요가 있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정년퇴임을 맞아 대담집 ‘행동과 사유’, 논문모음집 ‘사유의 공간’(이상 생각의나무 刊) 등 2권의 책이 나왔다. 그러나 독특한 형식을 취했음에도 이 책은 김우창 교수와 그의 동료, 제자, 후학들의 깊은 상호신뢰 속에서 김 교수의 학문적 작업을 되씹어보는 회고의 기능에 그친 감이 있다.

차라리 김우창과 동년배 학자들이나, 그 동안 김우창에 대해 단발적으로 비판해온 강준만, 김진석 등의 학자를 초청해서 대화를 나눴다면 대담의 애초의 목적인 ‘김우창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이 훨씬 선명히 드러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든다.
논문모음집도 큰 열의는 없어 보인다. 예전에 발표됐던 글도 몇편 있고, 새로 쓴 글들도 김우창의 사상적 스펙트럼을 분담해서 분석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송무 경상대 교수(영문학), 황종연 동국대 교수(국문학)가 한국의 영문학과 국문학에서 김우창의 작업이 갖는 메타학문적, 비평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예리하게 분석했을 뿐 나머지 글들은 김우창을 잘 ‘細工’했다는 느낌이다.

김우창을 제대로 이해하고 소화하려는 시도들이 전혀 돌파구를 못 찾고 있다. 김우창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상당히 다양한 분야에서 접근이 시도됐지만, 국내의 인식론은 양극으로 나뉜다. 그 완벽한 사유의 논리에 대한 긍정과 실천성의 약화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우선 지나친 과대평가에서 파생된 문제들이 많다. 오래 전 김종철 영남대 교수가 “백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학자”라고 평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수긍했다. 하지만 과찬들의 동어반복 현상이 빚어지면서 김우창이란 텍스트는 찬양고무하는 글들의 벽에 칭칭 감겨서 더욱 모호해졌다.

김우창에 대한 배척, 혹은 슬슬 피하는 학계의 분위기도 안타깝다. 주류 영문학계(?)에서는 김우창을 영문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김우창이 '한국에서 영문학하기'와 관련해 많은 글들을 써왔고, 그에 기반한 평론활동을 했음에도 영문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평가가 거의 없었다. 기타 인문학 및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김우창을 제대로 읽은 학자들이 거의 없다. 철학자의 70%, 사회과학자의 90%가 김우창을 읽지 않았다는 게 한 학자의 추정인데 "영어로 된 책 읽고 논문쓰기 바쁜데 다른 분야를 읽을 여력이 없다"는 게 이유다.

그렇다면 김우창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지성의 봉우리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문학평단과 인문학적 이성주의를 표방한 각 분과의 소수자들의 연대로 이뤄진 공공영역(계간지들)에서 지속적 관심이 돼왔고, 그 안에서만 김우창은 사상의 대부였던 셈이다. 이는 백낙청이 인문사회과학 전반에서 폭넓은 독서의 대상이 됐고, 현재에도 되고 있는 점과 비교된다. 이와 관련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는 “한국 사회과학이 철학적 깊이를 추구하지 않는 낮은 학문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현실을 통박한 바 있다. 하지만 '전공' 밖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 안에서도 국내학자 글은 잘 안 읽고, 깊이있는 학문에 대한 열망이 없다는 것만으로 김우창 외면현상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다. 뭔가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철학과 문학비평, 그 비판적 대화’(책세상 刊)의 저자 김영건 계명대 교수(분석철학)는 “김우창의 세계관은 국내 어떤 철학자보다도 더 철학적이고 깊이가 있다”라고 서슴없이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김우창의 심미적 이성 개념이 철학적으로 볼 때 문제점이 많다”라고 생각한다. 다만 김우창이 철학적 개념을 툭툭 던지면서 그걸 활용해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을 철학공식에 따라 풀어나가는 철학자들의 작업 방식을 통해서는 김우창에 대한 비판이 결코 쉽지 않다라는 게 김 교수의 입장이다. 큰 뜻은 알겠고, 그 특유의 논리도 있으나 개념의 엄밀한 사용에서는 허점과 빈틈이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엄밀성'을 김우창에게 요구할 수 없다는 걸 철학자들도 인정한다. 딜레마다. 

그러고 보면 김우창에 대한 활발한 논의는 많은 부분 김우창의 ‘논리적 헤게모니’ 속에서 이뤄져왔고, 이것은 김우창이라는 블랙홀 속으로 해석자가 빨려들어가는 현상을 낳아왔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김우창은 한국에서 질리지도 않는 모방과 반복, 리바이벌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판단'과 '고증', '주장'이 아니라, '비평적 상상력'의 논리적 변환이라는 차원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단단한 비평담론의 양적확산이라는 차원에서 의미는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방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김진석 인하대 교수(철학)는 “김우창의 글들이 시종일관 서구의 텍스트들을 합리적으로 논평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라고 비판한다. 이것은 '논평'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주목해볼만한 지적이다. 논평이라는 것은 어떤 이론을 논리적으로 비평한다는 것인데, 그 비평의 결과물은 학적 주장의 근거로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주장과 연결되지 못하고 논평만으로 머물 때는 '논리게임'으로 비칠 수도 있다. 김우창 세대에서는 이런 논평이 서구지식을 수입하는 비평적 방식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자생적 학문'이 요구되는 요즘, 이런 담론의 순환을 그대로 이어받는 태도는 수용 불가능하다. 김진석 교수는 ‘대학개혁’과 ‘정치자의 덕목’에 대해 쓴 김우창의 글이 상당히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에서 서양텍스트들을 한참동안 논의하고 난 뒤에 “시장원리로 대학을 재단할 수 없다”는 식으로 주장은 짧게 그친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런 비판은 오히려 김우창 에피고넨에게로 향할 때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김우창에 대한 비판은 그런 ‘논리게임’과 '사유의 추상적 수준'이 갖는 역할에 대한 제대로된 인식을 세워나가는 일에서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담론공간은 그 동안 '내용'을 갖고 싸웠지, 이런 담론에 대한 메타코멘터리를 구성하지는 못했다. 사회과학에서는 외국이론을 적용하기에 바빴고, 인문과학에서는 원론적인 텍스트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으로 자족해왔다. 인문학의 이런 경향이 김우창 교수의 그늘 아래에서 비호받았던 측면은 지적될 필요가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세계의 문학’이 갈팡질팡 흔들렸던 모습, 요즘 폐간 위기에 처한 ‘비평’지가 뚜렷한 예각을 세우지 못했던 모습들, 평론가들이 잡지를 이끈 ‘문학동네’ 등이 이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시시비비를 따져가며 현실에 대해 용감히 발언하는 게 현재 한국의 지적 담론에 요구되는 절실한 변화라면, 김우창식 사유는 오히려 생산적인 글쓰기를 평가할 내부적 기준들을 마련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에 본의 아닌 ‘장애물’로 기능하는 것 같다.

또 하나 김우창을 둘러싼 시비는 ‘난해함’과 ‘명징함’ 사이에서 벌어진다. 사실 김우창 교수의 글은, 논리가 장대하게 전개되고 복합문이 많아서 그렇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난해'와 '명쾌'라는 이 두 개의 판단이 김우창 독자들의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김우창의 사상이 갖고 있는 ‘학제성'에서 발생한다. 사실 김우창의 난해성은 '센턴스' 단위가 아니라 '아티클' 단위에서 발생한다. 문장은 명쾌하지만, 글 전체로 나아갈 수록 학제적 입체성이 두드러지면서 약간 혼란스러워진다. 따라서 김우창의 난해성은 데리다, 들뢰즈와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매우 '한국적' 현상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김우창적 ‘학제성’의 성격과 의미를 먼저 규명하는 것이 순서가 돼야 하는데, 한국의 학자들은 김우창이 다방면에 걸쳐서 많은 지식을 습득했다는 양적인 차원에서 그를 조명해왔다. 이런 평면적인 인식에서 김우창의 입체성이 제대로 조명될 리가 없다. 따라서 김우창이 녹여내는 학문들의 종류에 대한 분류, 김우창의 사유체계가 하나의 도식으로 그려질 때 그 각각의 학문이 다이어그램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 그런 위치와 비중을 결정한 개인적, 사회문화적 배경, 개별학문의 자기한계성에 대한 김우창의 자각과 그 한계성의 경계를 넓혀나가려고 한 사유의 결절점들을 찾아나서야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중요한 ‘본질’을 점검하지 않은 상태에서 김우창에게 다가가는 것은 머리 없는 뚱뚱한 몸통이 되기 쉽다.

사실 김우창 말고도 한국의 근대학문의 이론적 틀을 닦은 여러 학자들이 있다. 장회익, 백낙청, 김용옥, 조동일, 최장집 등의 사상이 갖는 ‘학제성’의 문제도 중요하다. 김우창 연구서를 펴낸 문광훈 박사는 이런 지적에 대해 “학문학적 전통이 생겨날 필요가 있다”는 대답을 한다. 문 교수는 “학문학을 하려면 자신의 분과학문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즉 학문의 테두리에 대한 자기 한계의식이 필요한데 그런 자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 드물다”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학문의 발전과 세대교체를 위해서는 '학문학'이 절실히 요구된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는 “학계가 김우창 선생의 저작을 고립시켜놓고 보는 경향이 제대로 된 인식을 막아왔다”라고 지적한다. 같은 시대에 비슷한 활동을 한 백낙청, 김현 등의 학자와 비교해봄으로써 “과연 내실이 있었는가”라는 비판적 관점도 필요하다는 것. 너무 텍스트만 쳐다보지 말고 인간, 학자, 역사 속의 개인, 학문(담론)공동체 속의 지식인으로서 다양하게 김우창을 조명해보자는 취지로 들린다.

하지만 비판의 목적은 분명해야 한다. 김우창에 대한 한국의 왜곡된 인식을 문제삼는 것은 우리 학문의 이론적 토대를 닦은 1세대 학자들을 후학들이 객관화할 수 있는 학문적 저력을 갖추자는 취지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담집에서 보여준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의 김우창에 대한 집요한 비판은 매우 유감스러운 풍경이다.

 그는 김우창이 전쟁통의 고통과 격리된 목가적 공간에서 성장했다는 점, 호남 출신이면서 호남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이유가 명문대 교수, 최고의 지식인이라는 위치 때문이라는 점, 차별적 현실 속에서 고고한 원론적 진단만 고집한다는 점, 로고스·파토스·에토스가 혼융되면서 상당한 혼란을 빚는다는 점, ‘심미적 이성’이 결과적으로 감성의 약화를 부른다는 점, 김우창의 이상적 정치이념이 폐쇄주의로 빠지지 않으면서 내면성 등을 구체화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을 질문했다.

하지만 이러한 윤 교수의 질문들은 그 표현은 과격하지만 내용적인 면에서는 별로 예리하지 못하고, 결론이 나와있는 비판,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이런 엇나간 비판은 김우창 사상의 학제성 규명, 또한 동시대 학자들과의 역할비교 등을 통해, “김우창이 우리 인문학의 근대화가 보여주는 하나의 유형”으로 파악된 후라면 많이 해소될 것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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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2004-09-16 00:47:55
강성민 기자의 글은 항상 훌륭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