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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에 대한 정신분석…뒤집힌 나르시시즘이 아닐까
서양 철학에 대한 정신분석…뒤집힌 나르시시즘이 아닐까
  • 장은주 영산대
  • 승인 2004.09.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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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서평_'나르시스의 꿈'(김상봉 지음, 한길사 刊, 2002, 396쪽)

나르시스의 신화는 그 동안 많은 문학 작품들이나 철학, 그리고 정신분석에서 우리 인간의 문제를 반추하기 위해 참조해야 할 어떤 원형적인 모델을 제시해주었다. 철학자 김상봉은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이라는 부제를 달고 2년 전에 나온 이 책에서 서양철학 전체에 대한 일종의 정신분석을 위해 이 신화를 끌어 들인다.

그에 따르면 서양철학은 그 시원과 발전과정, 그리고 그 최고의 발전태에서 기본적으로 나르시스의 운명과 비극을 자신의 본질로 삼고 있다. 자신에게만 사로잡힌 정신, 단지 자기의 거울상으로서만 타자를 아는 정신, 그래서 그 빼어난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그 최고의 발전태에서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창조적인 것도 생산해내지 못하고 자기파괴적 혼란에 빠져버린 정신, 바로 그런 정신이 서양 정신이다. 서양정신의 허구적 보편성에 대한 미몽에 빠져 있는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반면 반복되는 능욕과 모멸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는, 결코 나르시스 같은 아름다움을 갖지 못한 ‘우리’는, 그래서 아마도 다행스럽게도 그 비극을 같이하지 않아도 좋을 ‘우리’는, 그 깨달음 위에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철학의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존재와 역사 그 자체가 이미 반-나르시스적이다. ‘우리’는 恨이고 추함이고 슬픔 그 자체다. 그러나 답의 실마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끝없는 한과 추함과 슬픔의 나락 그 깊은 곳에서 단순히 내가 아닌 남을 보고 당신을 보고 ‘님’을 보게 되었는지라, 나르시스의 저 비극적 자기파괴의 소용돌이를 건너 뛸 수 있는 정신적 발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미덕과 성취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나는 아직 김상봉처럼 빼어난 문학적 문체로 철학 글을 쓰는 우리 철학자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대중철학서들의 장난기 같은 쉬움이 아닌 방식으로 어려운 철학사상과 개념들을 그처럼 쉽고 명료하면서도 정확하고 깊이 있게 풀어낼 수 있는 철학자를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 철학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어설픈 ‘개똥철학’의 수준을 뛰어 넘으면서도 색깔 있는 자기목소리를 갖고 있다. 단순한 개별 저작의 텍스트 분석 같은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 전체의 근본정신을 캐묻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초라한 아카데미즘만을 추구해온 우리 철학계가 본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서양철학에 대한 정신분석은 어쩐지 조금 ‘오버’한 것처럼 보이며, 역설적으로 우리 문화의 억눌린 나르시시즘만을 자극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스럽다.

가혹한 인문학의 위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녹녹치 않은 철학적 저작에 대한 그간의 언론의 호의적인 서평들과 대중들의 반응 속에서 나는 짓궂게도 이미 어떤 ‘우리’의 나르시시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동안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를 억눌러왔던 서양의 철학에 대한 통쾌하고 근본적인 비판, 그리고 지독한 자기상실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의 슬픔 속에서 저자가 들춰내는 대안의 실마리, 그 못난 ‘우리’가 새롭게 개척할 미래의 철학에 대한 약속 ― 그간의 서평들에서 한결같이 보여주었던 이런 메시지들에 대한 열광은 이미 그 자체로 어떤 나르시스적인 것은 아닐까.

나는 김상봉의 그 정신분석이 적어도 독일관념론, 그리고 이른바 서양의 ‘주체철학’ 또는 ‘의식철학’ 일반의 아포리아에 대한 나름의 탁월한 통찰임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논의에서 이미 깊이 통찰하고 있었듯이, 자기의식적 반성에서 문제는, 나는 단순히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나를 반성할 때, 그 나는 다른 사람이 보는 나다. 그러나 그 나 역시 내가 다른 사람 속에서 인식된 나일뿐이며, 나의 자기의식은 결국 자기인 타자 속의 다른 자기에 대한 열망이라는 혼란 속에서 나르시스 같은 자기파괴의 비극적 해결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떤 관점에서는 헤겔의 철학이야말로 나와 너의 화해, 곧 나르시시즘의 참된 극복을 모색했던 철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상봉은 헤겔이 의식의 자기반성을 의식의 자기규정으로 이해하는 한, 그 참된 극복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는 헤겔의 실패에 대한 그의 결론에는 동의하지만, 그의 진단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헤겔의 실패는 그가 말하는 ‘서로주체성’에 대한 몰인식이 아니라 ― 그에 대한 통찰은 헤겔 철학의 가장 큰 위대함에 속한다 ―, 그 ‘서로주체성’을 개인의 해방이라는 근대적 조건과 쉽게 화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어떤 총체적 인륜성 속에 담아내려 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사실 김상봉이 홀로주체성의 윤리학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칸트의 윤리학조차도 단순한 나르시스 신화의 틀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칸트의 윤리학이야말로 단순히 나 혼자만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다는 전제 위에서 어떻게 우리 모두가 함께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과, 비록 그 이론적 방식은 아닐지라도, 그에 대한 탁월한 답― 도덕적 보편주의 ―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말하자면 서로주체성의 올바른 방식이며 자유의 올바른 실현이지, 김상봉의 단순화처럼 서양정신이 자유롭기 위해서 자기 안에만 머물러야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한에서 그 ‘올바름’의 문제를 건드리지 조차 않고 있는 그의 ‘슬픔의 해석학’이라는 것도 사실 아직은 공허할 뿐이다. 

나는 여기서 성급한 ‘우리’의 개입과 작동을 본다. 한 번도 남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본 적이 없는 서양과 동일시할 수 없는 ‘우리’, 그러나 그렇다고 단순히 사실은 ‘중국’을 나타낼 ‘동양’이라는 이름아래 밀어 넣어 버릴 수도 없는 ‘우리’, 초라하고 못난 그 ‘우리’의 슬픔에 대한 위무, 바로 이 독특한 철학적 과제에 대한 저자의 사명감이 그를 서두르게 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왜 ‘우리’인가. “우리”가 문제이기는 하다. 나와 너의 상호 인정, 단지 너를 통해서만 내가 있을 수 있음에 대한 깨달음, 너 속에서 나를 잃어버릴 수도 있으되 그러나 바로 그런 가운데서 참된 나를 확인할 수 있는 “우리”-관계의 확보, 이 지난한 철학적-이론적 과제이자 사회적-실천적 과제가 그러나 왜 꼭 서양이 아닌 ‘우리’의 성취로서만 완수될 수 있을까. 그 과제의 완수를 위해서는 우리는 ‘서양’도 ‘우리’도 진정으로 초월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김상봉이 말하는 그 ‘우리’의 슬픔 역시, 뒤집힌 나르시시즘, 곧 어떤 ‘못난 나르시스’의 슬픔은 아닌지.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황지우)

장은주/영산대 사회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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