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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너무 홀대 당한다-변방의 장르에 ‘문학적 시민권’ 부여하라
에세이, 너무 홀대 당한다-변방의 장르에 ‘문학적 시민권’ 부여하라
  • 이동하 서울시립대
  • 승인 2001.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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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 / 서울시립대, 국문과

오늘날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시, 소설, 희곡 등 세가지 장르만이 문학공화국의 당당한 시민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앞의 두가지가 절대적인 특권을 누리고 있다. 어떤 시나 소설과 비교해 보더라도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의 아름다움과 생각의 깊이를 가지고 독자를 감동시키는 에세이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지만, 세상의 통념은 그런 글들을 문학으로 인정해주는데 지극히 인색하다. 그런 글들 가운데서는 비교적 짧고 가벼우며 주로 감성에 호소하는 성격을 가진 작은 일부분만이 ‘수필‘이라는 이름아래 문학공화국의 변방에서 곁방살이를 하는 것을 간신히 허용받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태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어떤 합리적 근거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지 못한 그와 같은 통념 때문에, 참으로 뛰어난 문학적 가치를 지닌 많은 글들이 문학사속에서 얼마나 부당하게 무시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가 하면, 문학적 가치라는 척도를 가지고 볼 때 아주 낮은 수준의 점수밖에 받을 수 없는 수많은 시나 소설들이 문학사 속에서 또한 얼마나 부당하게 과대평가되고 있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이야기해 보자. 역사학자인 김성칠이 6·25 초기의 수개월간에 걸쳐서 기록한 일기가 그의 사후에 ‘역사앞에서’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된 바 있다. 이 일기는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해서 씌여진 소설작품들 가운데 다수보다 분명 더 높은 수준의 문학적 아름다움과 더 깊은 수준의 사색이 지닌 매력으로 독자를 감동시킨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문학사를 논하는 사람들은 6·25를 배경으로 한 소설작품은 아무리 미숙한 수준의 것이라도 빠짐없이 찾아내어 거론하고자 노력하지만, 김성칠의 일기는 아예 처음부터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것으로 돌려 놓는다. 이런 것이 문학사를 기술하는 바람직한 태도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이와 같은 성격의 문제점은 동일한 사람이 쓴 글들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나타난다. 이광수의 경우를 가지고 생각해보자. 이광수가 낸 ‘인생의 향기’라든가 ‘돌베개’ 같은 책에 수록되어 있는 많은 수필들과 역시 그가 쓴 ‘재생’이니 ‘그 여자의 일생’이니 ‘애욕의 피안’이니 하는 따위의 많은 소설들을 한번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라. 전자에 대해서도 물론 다양한 비판이 가해질 수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것이 후자보다 월등 우수한 문학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는 사실만은 누구라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나 문학사를 기술하는 자리에서는 어디까지나 후자만이 본격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뿐이며, 전자는 기껏해야 문학공화국의 변방에서 간신히 곁방살이나 하고 있는 초라한 존재 정도로 취급되거나 아니면 김성칠의 일기처럼 아예 처음부터 ‘문학동네’의 식구가 아닌 존재로 간주돼 무시당해 버린다. 이런 것이 바람직한 태도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잠깐 시선을 돌려 우리나라의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20세기 이전에는 결코 그처럼 편협한 문학관이 지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서양의 근대적 문학관이 들어와서 패권을 장악하기 이전의 장구한 기간 동안에는, 에세이의 범주에 속하느냐, 시나 소설의 범주에 속하느냐 하는 점 때문에 원천적으로 차별이 가해지는 일이란 아예 없었다.
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나 문학사를 기술하는 자리에서나, 장르를 가지고 차별을 하는 것은 어차피 잠정적이고 상대적인 성격을 갖게 마련이다. 그 점을 인식한다면 오늘날 통념으로 굳어져 있는 시·소설 위주의 문학관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맹신할 이유가 없다. 그러한 문학관이 정말 소중한 문학적 가치를 가진 많은 텍스트들을 문학의 영역 바깥으로 추방해 버림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풍요롭지 못한 문학의 세계를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에세이의 넓고 다채로운 세계를 문학공화국의 중요한 일부로 영입해 들여야 한다는 것은, 문학의 진정한 존재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비추어 보거나, 우리의 문학사를 풍요롭게 만드는 길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비추어 보거나 명백한 당위로 인정받아 마땅한 것이 아닐 수 없다.
hyogo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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