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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_노암 촘스키는 과연 위선적인가
초점_노암 촘스키는 과연 위선적인가
  • 최철규 기자
  • 승인 2004.09.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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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공정성’을 지켜라 vs 더 나쁜 것은 국가폭력이다

복거일 등 보수주의 및 자유주의 색채를 띤 지식인들이 필진으로 참가하는 ‘시대정신’ 여름호에 노암 촘스키를 비판하는 흥미로운 글이 실렸다. 필자는 호주의 출판업자이자 대학에서 역사 및 사회이론을 강의했던 케이쓰 윈드셔틀인데, 그가 미국의 시사월간지 ‘The New Criterion' 2003년 5월호에 발표한 글이다.

‘노암 촘스키의 위선’이라는 제목을 볼 때 꽤 공격적인 이 글은 촘스키가 양심적인 반미지식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 볼 때 매우 관심을 끄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과연 9?11 테러 이후 진보담론계에 거의 ‘신화’로 군림하고 있는 촘스키의 새로운 ‘진실’이 이 글에 담겨있을 것인가. 그로 인해 촘스키 쏠림현상을 교정하는 효과를 이 글이 발휘할 수 있을까.

촘스키, “신 지식관료계급의 완벽한 전형”

윈드셔틀은 촘스키의 전반적 언행을 꼼꼼히 조사하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반론을 제기한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객관적으로 비판이 이뤄진다는 인상을 준다.

우선, 그는 촘스키가 정치적 ‘자유주의자이며 무정부주의자’임을 자평함에도 불구하고,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 모택동 등의 혁명적 정통 공산주의자들을 지지한 것은 정치적 신념의 위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나아가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중국 등 공산 정권들이 사실상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와 살인정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지도자들에 대한 사후 처벌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미국의 국제적 폭력 문제만 걸고넘어지는 것은 ‘윤리의 이중적 잣대’를 적용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촘스키의 학자적 양심에도 메스를 댄다. 예컨대, 필자는 촘스키가 9.11 테러를 ‘매우 잔학한 행위’라고 비판하면서도 클린턴 정권의 수단 폭격 사건이 야기한 피해에는 필적하지 못한다고 언급하며 테러에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지적한다. 촘스키의 이러한 행위는 ‘사기’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한다. 촘스키가 수단 폭격의 피해 규모를 입증하기 위해 차용한 기관들-Human Rights Watch, 독일대사관- 의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며, 제약 공장 폭격으로 인해 수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촘스키의 주장 또한 논리적 근거가 없다는 것.

또한 윈드셔틀은 촘스키가 ‘민중에게 권력을’이라고 외치면서도, 정작 ‘세뇌 모델’이라는 미디어 이론을 통해 언론인들과 일반 미디어 청취자들을 “속기 쉬운 무지한 사람들”로 간주하는 지적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뿐만 아니라, “군산복합체 국가의 노예들”이 되어가는 지식관료계급을 비판하지만, 정작 촘스키 자신이 국제사회의 폭력적 재구성을 암묵적으로 조장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 한 “신 지식관료계급의 완벽한 전형”일뿐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국가 테러범은 누구인가

하지만 이런 비판에 대해 국내 진보학계에서는 잘못된 역사인용과 논리적 궤변에 찬 비판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가령 윈드셔틀은 수단 폭격 사태가 밤에 이뤄졌기 때문에 무고한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고한 인명 피해 발생’이라는 문제의 핵심을 짚지는 못하고 있으며, 글의 어디에도  CIA의 잘못된 정보에 의해 폭격 사태가 발생했다는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대사회 발언에서 지적 철저함을 지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걸 촘스키의 지적 불처저성을 비판하는 윈드셔틀은 몰랐을까.

한편, 촘스키가 맹목적인 반미주의의 틀에 갇혀 다른 국가들의 폭력성을 용인한다는 주장도 사실과 맞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촘스키가 지은‘숙명의 트라이앵글’을 번역한 유달승 한국외국어대 교수(중동정치)는 필자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자살폭탄공격도 동시에 비난하고 있는 촘스키의 견해를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다고 평가한다.

촘스키의 미디어 이론을 ‘허구적 이론’으로 규정하는 필자의 주장도 논리적 비약에 불과하다. 촘스키의 ‘세뇌 모델’이 언론가나 미디어 수용자의 자율적 선택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윈드셔틀의 주장 또한 별로 새로울 게 없다. 윤영철 연세대(신문방송) 교수는 촘스키의 미디어 이론이 “국가 외교정책의 틀에 따라 국제문제를 보도하는 미국 언론들의 불공정 행태를 적절히 설명함으로써 호평을 받아왔다”라고 말한다. 이는 촘스키가 겨냥하는 것이 ‘대중’이 아니라 ‘매체’임을 지적한 것이다. 결국 윈드셔틀은 매우 낮은 학문적 수준에서도 수많은 사실적,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글을 쓴 셈이다. 이는 그의 글을 실은 미국 시사월간지 및 그것을 번역 게재한 국내잡지의 공정한 편집원칙과 수준을 의심케한다. “촘스키의 영향력 아래 놓인 우리의 일부 지식인들과 사회운동세력이 가진 논리적 오류를 짚어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는 ‘시대정신’의 편집자 주가 왠지 초라해 보인다.

최근들어 진보이론에 대한 보수적 관점의 비판이 국내에 머리를 들고 있다. 냉전기, 탈냉전기, 테러정국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오며 미국을 비판해온 지식인들의 논리적 오류를 짚는 ‘쓸모있는 바보들’(조선일보사 刊)같은 책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책 또한 윈드셔틀이 보여주는 논리와 문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지적 공정성’을 문제삼는데 현재로서는 그 사실성이 의심되고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제3세계 현실에 적합한 인권은 무엇보다도 집단의 생명권이다. 따라서 그들의 생명권을 짓밟는 미 제국주의 세력을 먼저 비판하는 것이 옳다. 후세인, 전두환 등의 인권 탄압을 배후에서 지원한 미국이야말로 인권 침해를 일삼는 국가테러범 아닌가”라고 강정구 동국대 교수(사회학)는 묻는다. 물론 강 교수의 입장은 모든 이념적 세력들을 설득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그래도 비판이 이뤄지려면 상호간에 최소한의 학문적, 윤리적, 이념적 교집합이 존재하는 집단이나 개인끼리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번 사례에서 느끼게 된다.

최철규 기자 hisfuf@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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