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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들을 추억함_③축음기와 SP음반
사라지는 것들을 추억함_③축음기와 SP음반
  • 이동순 영남대
  • 승인 2004.09.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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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음기가 들려주는 우리의 현대사

1. 바쁜 생활의 틈에서 잠시 시간의 여유가 생길 때 내가 즐겨 찾는 곳은 고물상이다. 고물상에는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이 쓰고 버린 온갖 물건들이 각종 쓰레기들과 함께 먼지를 뒤집어쓰고 누워 있다. 나는 어느 날 고물상의 한쪽 구석에 볼품없이 놓여 있는 한 개의 남루한 상자를 보았다. 그것은 지난 과거 시간 속에서 한때의 영화를 자랑하던 축음기였다. 어린 시절, 친구네 집 안방 탁자 위에 단정하게 얹혀져 있던 모습을 본 것이 그 후 몇 년이던가. 이 작은 기계를 짐 자전거 뒤에 시골장터마다 찾아다니며, 그것을 틀어서 손님을 모으며, 약장수를 했다던 한 노인을 만난 적도 있었다.

나는 거미줄이 잔뜩 낀 축음기로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녹이 발갛게 슨 사운드박스는 이미 부드러운 움직임을 잃었고, 음반을 올리도록 돼있는 둥근 받침쇠의 고급천은 온통 누렇게 삭은 빛깔로 바래져 있었다. 그 오랜 세월의 부대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태엽은 상하지 않았는지, 구멍에 손잡이를 끼워 넣고 천천히 돌리니 슬금슬금 회전해 가는 모습이 자못 대견스럽다. 축음기 뚜껑 안쪽의 판꽂이에는 깨어지고 금이 간 SP음반이 몇 장 꽂혀 있다. 음반 중앙의 라벨을 자세히 살펴보니 흘러간 옛 가객 임방울의 ‘쑥대머리’도 있고 남인수, 이난영의 낯익은 이름들도 언뜻언뜻 보인다. 나는 태엽을 천천히 감아서 음반을 적절한 속도로 회전시킨 다음 임방울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생각는 것이 님 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지금으로부터 어언 80년 전의 청년 임방울은 1990년대의 어느 시점에 문득 되살아나서 그 목소리도 생생하게 한바탕 처절한 귀곡성을 뽑아낸다. 나는 그 낡아빠진 축음기를 보듬고 집으로 돌아와서 물로 씻고, 걸레로 닦고, 쇠붙이에는 윤이 나도록 기름칠을 했다. 정성을 쏟은 만큼 그 기계는 제법 꼴을 갖추기 시작한다. 이제 축음기는 내 서재의 한 귀퉁이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이제 더 이상 소멸과 망각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려는 듯이, 혹은 덧없이 흘러가 버린 시간의 의미를 다시금 찬찬히 되새기려는 듯이 눈을 지그시 감고 어금니를 꼭 깨물며……

2. 오늘도 세월의 묵은 때가 켜켜이 덮여 있는 몇 장의 낡은 축음기판을 구해 와서 손질을 한다. 이 손질이란 다름 아닌 세숫대야에 이 판들을 몇 장 씩 담그고, 빨래 비누에다 구두 솔을 몇 번 쓱쓱 쓸어서 한 장 씩 번갈아 가며 힘껏 문질러 씻어대는 것이다. 이렇게 해도 바늘이 돌아갈 음반의 홈에는 아무런 상처가 나지 않는다.

땟물이 거무죽죽하게 나올 정도로 한참 씻노라면 어느덧 축음기판은 각종 먼지와 기름때가 말끔히 씻겨진다. 아직도 물이 뚝뚝 흐르는 젖은 축음기판을 거실의 사방 벽과 책장의 주변으로 물기를 말리느라고 나란히 펼쳐 놓을 때, 그것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는 내 마음은 꼭 음반들이 이루어내는 觀兵式에라도 임하는 듯 사뭇 의기양양하고 우쭐해진다. 어서 습기를 건조시켜 저놈이 지닌 소리를 들어보아야지. 나는 벌써 느긋함을 잃고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8.15와 6.25 직후에 찍어낸 축음기판들은 거의가 재생음반이라 보면 된다. 물자가 너무도 귀했던 시절이라 엿장수들이 수집해온 일본노래 판 위에 파라핀을 한 겹 얇게 코팅을 해서 손으로 한 장 씩 음반을 찍어내었을 것이다. 이런 음반을 몇 차례 반복해서 듣다보면 우리말 노래와 일본말 노래가 마구 섞바뀌어 이상한 소리로 들려오기도 한다. 일본노래가 언뜻언뜻 나오는 부분은 코팅한 파라핀의 피막이 이미 다 닳아진 부분이다. 이 무렵에 이렇게 찍어내어 유행한 노래들이 대개 북녘에 두고 온 고향하늘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실향민의 눈물 섞인 노래라든가, 부산 피난 시절의 삶의 애환을 담은 가요들이다.

한 장의 SP판과 낡은 축음기판 따위는 이미 오래 전에 흘러가 버린 과거시간의 추억 어린 유품일 뿐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소중하게 갈무리해서 다시금 그 소리를 들으며 지난 현대사의 의미를 골똘히 생각할 때 축음기와 SP판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무한한 깨우침과 겸허함을 되돌려주는 하나의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어디 축음기 하나에만 국한되는 일이랴. 지난날의 모든 문화유산을 우리가 옳게 해석하고 냉철하게 판단해 가는 정신, 이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역사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이동순 / 영남대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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